김윤식의 문학산책
김윤식의 문학산책 /
20세기가 저지른 못난 행위 중 스스로 해결치 못해 다음 세기로 넘겨진 것의 하나에 위안부(정신대) 문제도 들 것이오. 피해 당사자들의 속절없는 고령화 앞에 서면 더욱 그런 느낌이 가슴을 옥죄오. 이 세기적 난제에 문학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두 편의 체험기와 두 편의 소설을 조금 음미해 보고 싶소.
여기는 1945년 3월 버마전선. 조선인 학도병 세 명이 탈출을 했소. 나침반도 없이 생쌀을 씹으며 일몰을 기다릴 수밖에. 어둠이 깔리자 숲속 갈림길에서 트럭을 향하는 상기된 경상도 사투리에 마주쳤소. 7, 8명의 여자들이 맨 땅에 보따리를 놓고 있지 않겠는가. 후퇴하는 부대 속에 넣어달라는 호소였소. 여자들은 몸뻬에 소매가 짧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소. 나뭇잎 사이로 새어나오는 달빛을 받아 그 하얀 셔츠가 탈출병에겐 고향집 초가지붕 위에 핀 한 무더기의 박꽃으로 보여 마지않았소(박순동, <모멸의 시대>, 1965).
또 하나의 체험기도 적어두고 싶소. 여기는 북만주. 학도병(게이오대) 출신의 졸병이 도하작전 훈련에 내몰리고 있었다. 사령부 앞을 지날 때면 각 부대 이름이 적힌 위안부의 집을 보곤 했다(만주 XX부대라 쓴 커다란 표찰이 걸려 있어 누가 보아도 그것이 군 관련 시설임은 분명한데 최근에 이야기되는 것이 이 사실과 달라 이상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훈련에 지친 졸병들은 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왜? 너무도 피로했으니까. 어느 날 고된 훈련 도중 그들은 실로 황홀한 장면에 부딪쳤다. 강가에 나와 송사리를 잡고 있는 위안부의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순백의 다리”가 그것. 전사한 전우를 회억할 때 이 “순백의 다리”도 함께 떠올라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훗날 고명한 작가 된 이 졸병은 적었소(야스오카 쇼타로, <아사히신문>, 1992. 2. 12).
흰 박꽃과 순백의 다리가 체험기의 산물이라면 소설의 경우는 어떠할까. 버마 전선에 투입된 목포 출신의 조선 학도병이 전주 출신 위안부를 만났다고 소설에서 썼소. 위안부 쪽에서는 <진주라 천리길>을 부르고 학도병은 <목포의 눈물>을 불렀소. 누가 누구를 위안했을까(이가형, <분노의 강>, 1993). 소설이라 하나 논픽션에 “약간의 픽션”을 가했을 뿐이라 작가는 토를 달았소.
이와 극히 유사한 경우, 그러니까 일본인 사소설의 전형에 <매미의 추억>(1993)이 있소. 작가는 구제(舊制) 고교 중퇴. 5년 동안 남방전선을 헤맨 졸병. 이름은 후루야마 고마오. 일본군 특유의 온갖 기묘한 규율을 견뎌온 이 졸병이 고희에 이른 지금 기억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하나는 야뇨증에 시달린 조금 모자란 전우. 둘은 도적질의 명수인 약삭빠른 전우. 셋은 자기를 거목에 매미처럼 달라붙게끔 한 덩치 큰 조선인 위안부. 이들의 이름은커녕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세 이미지만은 살아 있다는 것. 대체 이 세 주인공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물음을 던져보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상상해 보지만 “아무리 해도,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가 없다는 것.
위안부에 닿은 이들 네 가지 이미지란 새삼 무엇일까. 아름답다고 할 분도, 거부반응을 보일 분도, 그저 담담히 대할 분도 있겠지요. 어느 편이든 한 가지 점엔 일치하리라 믿고 싶소. 곧 문학이란 역사에 관여하거나 어느 한쪽 편들기에 앞서, 나름대로 증언은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문학의 몫이라는 것.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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