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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토지>와 지네 체험

등록 2009-05-03 18:38수정 2011-12-13 16:34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루쉰의 <아큐정전(阿Q正傳)>에서 다만 Q자만을 훔쳐낸 <토지>의 작가는 (1993)라는 고백체 산문집을 썼소. 그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절박함이 있었다 하오. 그중의 하나에 지네 체험이 있소. “Q씨, 내가 쓰지 못하면 죽어야 했습니다. 그 시절에 말입니다”라고 입을 연 작가는 길가의 집이어서 바깥 소리를 막기 위해 통로와 책더미 위에 하얀 홑청을 씌워 놓고 한밤중까지 글을 썼다 하오.

그런데 그 하얀 홑청 위로 까만 리본 같은 것이 주르르 흘러내리지 않겠는가. 어마어마하게 큰 지네였던 것. 순간적으로 손에 집히는 빗자루로 닥치는 대로 내려쳐 짓이겼다 하오. 전신이 후들후들 떨릴 수밖에. 그래도 계속 글을 썼다 하오. 그런데 잠시 뒤에 그 흰 홑청 위로 먼저와 같은 또다른 까만 리본이 타고 내려오지 않겠는가. 오냐, 죽기 아니면 살기. 글 쓰는 것도 다 그만두고 또 죽일 수밖에. “새벽까지 쭈그리고 앉은 채 꼼짝을 못했어요”라고 Q씨에게 고백하고 있소.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 밤의 지네 체험이란 귀신에 홀린 심사였다 하오. 글쓰기 따위는커녕 날이 밝아올 때까지 꼼짝 못했다 하오.

<토지> 이전에 겪은 이 소름 끼치는 체험이 대하소설 <토지> 속에 수용·처리되지 않았을 이치가 없소. 왜냐면 <토지>란 이 작가에겐 귀신에 홀린 글쓰기, 기괴하기 짝이 없는 글쓰기였으니까. 그러기에 이 지네 체험은 <토지> 전체 속에 녹아 있을 수밖에.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아주 천박한 수준의 실증주의적 독자라면 지네가 등신대(等身大)로 등장하는 대목을 찾아 헤맬 터. 필시 그는 노루고기를 잘못 먹고 부정 타 죽게 된 최치수의 부친을 위해 미음을 쑨 그 속에 난데없는 지네가 들어 있었다는 장면에 마주칠 터. 이 장면까지 오면 이 천박한 실증주의 독자도 상상력을 발휘할 만했소. 그가 체험한 지네 체험과의 비교가 그것.

1993년 8월 초 이 실증주의자는 통영 소재 작은 섬 수국(水國)엘 갔소. 시와시학회 주최 세미나가 있었으니까. 그날 밤 작은 독방에서 잠이 들었소. 등허리가 스멀스멀해서 눈을 뜨고 알전등을 켰소. 러닝셔츠를 벗자 불빛에 드러난 것은 큰 지네가 아니겠는가. 소름이 끼칠 수밖에. 목침으로 놈을 쳐죽이고 순백의 러닝셔츠까지 버리고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큰 홀로 들어가자 거기 흐린 등불 아래 이 실증주의자를 태양 아래서 비웃던 파이프의 시인과 등산화의 시인, 두 대선배 사백께서 잠들어 있지 않겠는가. 이 둔한 실증주의자도 그 옆에 누워 보았소. 잠은 끝내 오지 않았소. 어째서 잠이 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알 것도 같소. 지네가 가져온 공포의 실체를. 순백의 배경 속에 놓인 움직이는 흑색이 바로 공포의 실체였던 것. 움직이되 소리없이 움직이기, 움직이되 마디마디로 분절되어 흡사 물 흐르듯 움직이기. 하얀 홑청 위에 까만 리본 같은 움직이는 물체, 하얀 미음 속에 삶긴 시커먼 물체, 그리고 순백의 러닝셔츠 속에 스며든 물체. 뱀이나 지렁이 모양 도무지 의인화(擬人化)가 절망적인 것.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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