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작가인 내가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참 미스터리”라고, 수능시험에 자기 작품이 출제된 시인 한 분이 말했다 하오. 저작권법에 명시됐듯 작품은 법적으로 작가의 소유물인 만큼 이런 불만도 나옴 직하오. 이 사실을 전제한 마당에서 작가에게 조언을 한 분이 프로이트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의도란, 따지고 보면 한갓 의식 범주의 사안에 지나지 않는 것. 방대한 무의식이 창작에 투영되는 만큼 작가의 의도 여부는 소중하긴 해도 부분적임을 면치 못하는 것.
이 해묵은 과제가 지난해 이 나라 수능시험을 둘러싸고, “시인이 뿔났다”, “교사도 뿔났다”, “학생도 뿔났다”로 저널리즘에 오르내린 바 있소. (<중앙일보> 2009.11.24, 동 11.27, 동 12.12) 뿔날 이유란 과연 무엇일까. 시인 쪽이 감정과 예술의 자리에 섰다면 교사의 선 자리는 이른바 일상적 현실 쪽이라는 것, 이 두 자리를 동시에 수용하기야말로 바로 ‘미스터리’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 미스터리가 시인 쪽에서도 교사 쪽에서도 낯섦에서 오오. 수용할 수도 없지만 수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어느 편에서든 찜찜하다는 것.
잠깐, 세상만사 안 그런 데가 어디 있던가. 이른바 제논의 네 가지 패러독스 중 ‘아킬레스와 거북’을 잠시 보실까. 아킬레스라면 발이 빠르기로 이름난 반신반인의 영웅. 그와 거북이 경주를 한다면 어떠할까. 초등학교 용으로 하면 토끼와 거북의 경주이오. 그 조건은 이렇소. 토끼의 속도는 거북의 두 배라는 것. 100m 출발점에 선 토끼는 거북이 50m 갔을 때 비로소 출발했소. 결과는? 이 물음에는 다음 두 가지 대답이 나오오.
(A) 토끼는 영영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와 (B) 둘은 같이 도착한다가 그것. 많은 사람들이, 제논 자신을 포함해서, (B)에 동의는 하지만, 이에 대해 제논 왈, “일종의 환상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찜찜하다”, “뭔가 거북스럽다”라고.
생활인으로 직감에 의거한 이 판단이 어째서 환상인가. 제논의 설명은 대충 이러하오. 토끼가 뛴 거리인 출발점에서 도달점까지의 거리 1이란 무한히 반분 반분으로 이루어진 부분의 총화가 아닐 수 없다는 것(1/2+1/4+1/8+1/16+…… = 1). 그러기에 토끼는 결코 도착점에 닿지 못한다는 것. 찜찜함, 기분 나쁨이란 이 사실에서 오는 것. 무한이나 극한 또는 연속성에 대한 이 미스터리 앞에서 희랍인이 뭔가 거북스럽고 찜찜하게 느꼈듯 오늘의 이 나라 수능 시험판에서도 그것이 되풀이되고 있는 형국.
논리상 명석하다는 수학의 경우에도 ‘진리’와 ‘정리’(定理) 란 따로 놀고 있다는 이 사실만큼 인간적인 것이 또 있을까. ‘정리’란 그것이 ‘증명된다’는 의미에서 올바른 것. 이에 대해 ‘진리’란 증명될 수 있음/없음에 관계없이 올바른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정리는 수학이라는 특정 분야의 내부에 속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증명이 필수적일 수밖에. 왜냐면 수학 자체(작가 자신) 속의 증명되기란 무모순이어야 하니까. 그런데 보시라. 동일 체계 속의 무모순이란 결정불가능성에 빠지고 마니까. 괴델의 불확정성 이론이 이를 가리킴인 것.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수학(작품) 외부의 모델 도입이 불가피한 법. 외부의 진리 말이외다. 15년에 걸친 수능시험, 그것은 이 나라 교육 현장의 ‘정리’와 ‘진리’의 정수를 모은 것이 아니었을까. 새삼 찬사를 보낼 만하오.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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