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4·19란 교과서적으로는 (1) 대구의 2·28, (2) 마산의 3·15, (3) 고려대의 4·18, (4) 전국적 4·19, (5) 4·26의 이승만 대통령 하야 등의 총칭이오. 4·19가 혁명이되 아주 특이한 혁명임을 가리킴이오. 위로부터의 혁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아닌 것. 이는 그 주체세력 부재에 알게 모르게 관련되오.
잠깐, 학생이 그 주체임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 아니겠소. 바로 그 때문에 4·19의 주체세력은 순진무구함을 가리킴이오. 시인은 이 사실을 직감했소. “하, 그림자가 없다!”(김수영)라고.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는 것. 주인 없는 혁명이기에 그만큼 숭고한 것, 바로 그 때문에 4·19는, 가까스로 해를 넘기자 도적맞을 수밖에요. 5·16 군사혁명이 그것.
이 강력한 군부 아래 4·19는 어째야 했을까. ‘의거’로 주저앉을 수밖에. 이 물음은 5·16의 힘에 비례하여 증대되는 것. 그러기에 거기에다 삿대질할 수밖에. 삿대질하기의 힘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4·19의 구심체가 요망되었소. 그 중심체는 어디서 찾아야 했을까. 여기에 응해오는 것이 3·15이오. 총알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시체가 바다에서 솟아오른 마산의 3·15 말이외다.
“보기 위한 동공 대신/ 생각키 위한 슬기로운 두뇌 대신/ 포탄이 들어박힌 중량을 아시는가?/ 비인간과 organism이 빚은/ 이위일체(二位一體)의/ 이 기괴한 신(神)”(유치환, <안공에 포탄을 꽂은 꽃 김주열 군의 주검에>)
마산은 이 기괴한 신을 저마다의 가슴에 새겨 넣었소. 부마항쟁(1979)을 아시는가. 이미 그땐 거리에 3·15탑이 우뚝 세워졌소. 마산시청 행정기구에 3·15과까지도. 이 도시의 자존심의 근거가 이보다 절실할 수 있었겠는가. 4·19를 읊은 시인 163명의 210편을 실은 시집 <너는 보았는가 뿌린 핏방울을>(2001)의 간행이, 3·15 공원의 탄생이 어찌 우연이랴. 마침내 3·15 국가기념일 제정(2009년)에 이르게 되었소.
그대 혹시 <가고파>의 고장에 들르시려는가. 맨 먼저 혹은 맨 나중엔 국립 3·15 민주묘지에 가보시라. 3·15의 시가 있는 길 말이외다. 그렇다면 금년 3월15일이 적당하오. 50돌을 맞아 제2차 10편 시비 제막식이 열리니까. 이곳에서 낳고 살다 죽은 시인 이선관(1942~2005)의 목소리에 잠시 발을 멈추어 보시오. 자기가 사는 곳이 곧 세계의 중심이니까. 이 사실을 일깨움이 시의 소명인 것을.
“한번 의미를 찾았고/ 다시 의미를 찾았고/ 또다시 의미를 찾으려는/ 이 고장의 자랑스러운 창 동네거리에서/ 시외 주차장으로 걷노라면/ 우뚝 멈춰지는 발걸음/ 여기가 구암동 애기봉 중턱/ 아직도 두 눈 부릅뜨고 누워있는/ 아, 1960년 3월 15일 그날/ 죽어도 살아 있음이여/ (…)마산의 열두 제자가 있는 한/ 이 땅의 변방이 아니라는 걸 알고 만다.”(<역시 마산은 이 땅의 변방이 아니라는> 부분)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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