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호랑이해 벽두, 남산 밑 수유+너머에 불려갔소. 이유는 하나. ‘신바람 일으키는 벽초의 분신들’(<한겨레>, 2009.11.6) 때문. 벽초에 대해 그대가 제법 아는 척했것다. 멍석을 깔아줄 테니 다시 한번 펼쳐보라는 것. 망설일 수밖에. 조금 공부한 것이란 벽초도 육당도 아닌 춘원 쪽이니까. 육당의 소개로 벽초와 사귀게 된 춘원이고 보면, 그리고 조선 삼대 천재 중 막내 격인 춘원이 벽초를 종내 우러러본 것으로도 멍석이 요망되니 지레 겁먹지 말라고 하지 않겠소.
납치 도중 중병에 걸린 춘원이 옛 친우 벽초(노동당 군사위원)에게 구원을 청했것다. 벽초가 즉각 그를 입원시켜 돌봤다는 것. 춘원의 사망 날짜가 1950년 10월25일이라는 것. 당초 평양시 입석 구역 원신리에 안장됐고 오늘날엔 평양 용성 구역 용궁 1동 월북인사 묘역에 이장됐다는 것 등등에서도 벽초의 보이지 않는 숨결이 작용되었는지도 모르니까. 요컨대 춘원을 논의하자 육당을 떠날 수 없고, 동시에 벽초를 제쳐둘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조선의 삼대 천재가 철난 무렵 국권 상실기를 맞았고, 함께 제국의 수도에서 제국의 언어로 된 문명을 배웠음이오.
귀국한 삼총사의 행보는 어떠했던가. 이에 대한 평가는 훗날의 역사 쪽이 맡을 몫이오. 역사란 엄정한 것. 긴 시간의 검토와 인내가 요망되는 곳. 문학 쪽은 어떠할까. 학자라고는 하나, 중인 출신의 육당은 <태백산 시집>(1911)의 시인이었고, 사상가이자 진짜 양반 출신의 벽초는 <임꺽정>의 작가이며, 동우회 운동가인 평민 출신 춘원은 문학을 한갓 여기(余技)로 여기면서도 <무정>(1917), <원효대사>(1943)의 소설가였소. 문학으로 엮일 만하지 않겠는가. 이 물음에는 다음 세 가지 위상이 전제되오. 당대의 평가가 그 하나라면 둘째는 시대적 평가, 또다른 하나는 독자 개인의 잣대이오.
가령 <임꺽정>을 두고 ‘조선적 정조의 발현’이라 했을 때가 당대의 평가라면, ‘통일시대를 여는 작품’이라 했을 땐 현대적 평가에 가깝다고 볼 것이오. 그렇다면 개개인 독자의 평가는 어떠할까.
여기는 무비사(武備司). 왜구가 쳐들어와 군사 모집하는 장면. 군에 자진 입대하고자 나아간 임꺽정. 대화 장면.
“너 어디 사느냐?” “양주읍에 삽니다.” “나이는 몇 살이냐?” “서른다섯 살입니다.” “부모와 처자는 있느냐?” “아버지가 있고 처자도 있습니다.” “네 집에서는 농사하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놉니다.” “아무것도 아니 하고 놀아? 네 아비는 무엇하는 사람이냐?” “소백정입니다.”
이봉학은 대번에 합격했는데 꺽정은 여지없이 낙방. 왜? 두말하면 군소리. 천민이니까. 천민이란 국방 위급상황에도 끼어들 수 없다는 것. 이 장면에서 그런 대단한 신분문제와는 관련없이 눈에 확 띄는 장면이 있다면 어떠할까. 고압의 전류가 불꽃을 일으킨 장면,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안 하고 논다”는 것. 아무것도 안 하고 놀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것만큼 천하에 놀랄 일이 따로 있으랴. 일찍이 <악령>의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스타브로긴의 입을 빌려 외친, 인류의 위대한 망상, 저 황당무계한 꿈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겠는가. 곧 수유+너머의 여제(女帝)의 주장이오.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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