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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도스토옙스키와 하루키-빨간 거미와 검은 거미

등록 2010-06-25 21:43수정 2011-12-13 16:18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보바리 부인>(1857)의 마지막 장면엔 ‘운명’이란 말이 나와 있소. 아내를 죽게 한 남자를 만난 보바리가 이렇게 말했다고 작가는 적었소. “이게 다 운명 탓이지요”라고. 오랜 시간 거듭 고치며 단어와 투쟁했고 문장 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겪었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치고는 의외라 할 만하오.

<악령>(1871)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이 말을 썼소. 주인공 스타브로긴을 자살케 한 사건을 작가는 이렇게 적었으니까. “극히 흥미 있는 상념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이런 상념이 제일 먼저 내 마음속에 떠올랐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이를테면 그러한 운명이었다고 보인다”라고. 여기에 나오는 “극히 흥미 있는 상념”이란 대체 무엇인가. 자기에게 겁탈당한 소녀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목매 죽는 장면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몰래 엿보기가 그것. 이 장면이 바로 지성적이라고 작가는 주장하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명확한 의식’, 그러니까 “극히 흥미 있는 상념”을 보여주는 작가의 수법에 있소. 주인공은 소녀의 자살 장면을 엿보기 위해 시계를 보고 있소. 그러다 한순간 망아의 경지에 빠지오. 창문 옆 접시꽃 위에 있는 조그맣고 빨간 거미를 보고 있는 동안이 그것. 시계를 재보니 소녀가 방을 나간 지 20분이 지났소. 문제는 이 빨간 거미에 있소. 주인공은 훗날 유럽 여행 중 황금시대의 꿈을 꾸었소. 꿈에서 깨자 난데없이 한 점이 나타나더니 점점 커지지 않겠는가. 그것은 “조그마한 빨간 거미”였던 것. 주인공은 이 빨간 거미를 안고 4년 동안 고민하다 자살했던 것.

작가 하루키는 어떠했을까. 근작 <1Q84>(2009)도 운명 타령에서 자유롭지 못하오. 매력적인 여주인공(남자의 고환을 정확히 차는 데 세계 제일의 선수)이 옛 소학 시절의 남자 친구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권총자살을 마음먹었을 때 작가는 이렇게 적어 놓았소.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다”라고. 내가 주목한 것은 작가의 수법이오. 이 여주인공을 작가는 맨 앞장에 내세웠소. 고속도로를 택시로 달리다 교통 체증에 막히자, 이 여자 좀 보소, 뭇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택시에서 내려 스커트를 허리까지 밀어올리고 도로의 철책을 넘어 비상구를 찾지 않겠는가. 작가는 이렇게 적었소. “비상계단은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지 군데군데 거미줄이 있었다. 조그만 검은 거미가 그곳에 달라붙어 조그만 사냥감이 걸려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그리고 급히 덧붙였소. “하지만 거미로서는 애당초 참을성이라는 의식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어째서? 거미는 본능에 따르니까. 그녀를 보시라. 자기 의지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지 않겠소. 작가는 이를 두고 ‘비상구’가 있다고 했소.

그러나 1984년을 기점으로 해서 비상구가 없는 세계에 놓였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문제삼는 것은 또 비상구에 대한 작가의 수법에 있소. 그녀가 반년 뒤 택시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소. 이번에도 교통 마비. 역시 그녀는 택시에서 내려 철책을 찾소. 왜? 비상계단의 그 검은 거미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이렇게 적었소. “그녀는 수도고속도로의 비상계단에 집을 짓고 있던 조그마한 거미를 떠올렸다. 그 거미는 아직도 살아 거미줄을 치고 있을까”라고. 급히 또 덧붙였소. “그녀는 미소지었다”라고. 불행히도 1984년을 기점으로 비상계단이 없어졌음을 그녀는 몰랐으니까. 달이 둘씩이나 뜬 세계 말이외다.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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