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문학산책
김윤식의 문학산책 /
〈Asia〉라는 제호의 계간 종합 문예지가 있소. 영어 표기가 원칙. 아시아 중심이라는 것. 어째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문예지가 영어 표기여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이 문예지 속으로 들어가 보면 두 가지 점이 부각되오. 아시아 중심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베트남, 필리핀, 인도, 네팔 등에 편중되었음이 하나.
다른 하나는, 이 점이 조금 기묘한데, 한국 작가의 경우엔 영역과 함께 한국어로 실렸다는 점.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적절할까. 제3세계 지역이 영어를 보편어로 하여 생활하고 있음이 현실이라면 한국 작품도 영어로만 실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국 독자를 겨냥한 조처라고 한다면 아시아의 명분에 어긋나는 지방성의 노출이며, 한국이 주체적으로 작용했다면 이 역시 아시아적 명분에 어긋나는 것. 왜냐면 아시아주의의 명분이라면 그 어느 나라도 중심체일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문예지의 출현은 심상치 않은 징후이오.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평가되기 때문.
그 증거의 하나로 송기원의 <육식>(2007)을 들 수 있소. 네팔 토롱 고개를 걷던 채식주의자 한국인이 원주민 노파가 내미는 야크 고기 조각 앞에서 큰 깨침을 얻는 장면은 한 알의 보석이라 할 수 없을까.
정도상의 (2008)도 그러하오. 탈북자 세 명이 옌지(延吉)시에서 출발하여 겪는 모험은 저 세렝게티 평원의 생리에 다름 아닌 것. 요컨대 이런 계열의 작품이란 편집 주간인, <존재의 형식>(2003)의 작가 방현석의 베트남 체험의 처녀성과 인접해 있다고 할 것이오.
이와는 대조적인 것에 계간 <자음과 모음>의 한·중·일 작가 동시 편집이 있소. 이 기묘한 몸부림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해온 그 어떤 한중일 문화 교류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지속적이며 창조적인 문화 소통을 꿈꾼다”라고 이들은 내세웠소. 꿈이라 했으니까 굳이 탈잡을 것은 못 되나 그럼에도 기묘함을 물리치기 어려운 것은 한중일을 망설임도 없이 묶었음이오. 대국 중국과 일본에 견줄 수 있는 한국 문화의 창조에 문학도 그 몫을 하겠다는 이 몸부림은 저 의 태도와 견줄 때 어떠할까.
무엇보다 한중일이 각각 자국어로 번역되어 게재된다는 사실, 곧 ‘언어와 시장’의 벽을 넘는다고 주장했음이오. 언어의 넘어섬이란 저 의 처녀성에 비해 여성성이라 할 만하오. 그것이 ‘시장’과 맞닿았음에서 오는 것인 만큼 훼손된 가치 속에 함몰될 가능성에 노출됨이오. 도시, 성, 여행, 상실 등을 공동 주제로 했음이 그 증거. 보시라. 이승우의 <칼>이 놓일 자리란 아무데도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도 <자음과 모음>도 함께 일방적이라는 사실. 그 누가 이 몸부림에다 삿대질을 하리오. 학병 출신 글쓰기의 작가 이병주를 기린 국제문학상을 만들고 제1회는 베트남 작가(2007)에게, 두번째는 중국작가(2009)에게 상을 준 것은 이와는 또다른 문맥이라 할 수 없을까.
이 처녀성, 여성성 다음 차례에 오는 것이 노인성이 아니겠소. 영미권 혹은 유럽권과의 몸부림이 그것. 현재로선 유관 단체의 시도 외엔 누구도 이에 대해 몸부림조차 치지 못한 형편. 이러한 우리식 몸부림의 의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보편어로 인류의 영원한 꿈꾸기인 문학하기가 그것. 우리는 시방 그 꿈꾸기의 입구에 서 있소.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이 처녀성, 여성성 다음 차례에 오는 것이 노인성이 아니겠소. 영미권 혹은 유럽권과의 몸부림이 그것. 현재로선 유관 단체의 시도 외엔 누구도 이에 대해 몸부림조차 치지 못한 형편. 이러한 우리식 몸부림의 의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보편어로 인류의 영원한 꿈꾸기인 문학하기가 그것. 우리는 시방 그 꿈꾸기의 입구에 서 있소.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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