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문학산책]
독고준의 투신자살에 부쳐
독고준의 투신자살에 부쳐
“최인훈 선생님의 <회색인>과 <서유기>를 젊은 시절 읽었을 때 나는 독고준의 미래가 궁금했다. 이 소설은 독고준이 살 수도 있었을 한 삶의 스케치다”라고 시작되는 소설 <독고준>의 작가 고종석씨는 1959년 생. <광장>을 낳은 4·19 혁명이 터졌을 때 겨우 두 살잡이. 이렇게 먼저 물어야 하오. 4·19란 무엇인가라고.
<회색인>의 작가도 그러했겠지만 <독고준>의 작가야말로 이에 대해 단호한 대답을 갖고 있어 보였소. 자유로 표상되는 4·19란 당연히도 또 압도적으로 서구적 소산이라는 것. 6·25를 만나 누나와 모친을 두고 아비와 매형이 미리 가 있는 이남으로 단신 월남한 원산중학생 독고준이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며 대학에 들고 동인지 <닫힌 세대>로 활동하면서 한반도의 수압을 잴 때의 그 수압계란 단연 서구산이었으니까.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안고 살아온 독고준의 삶이란 어떠했을까.
작가 고씨는 이 궁금증 앞에 충격요법을 도입했소. 74살 독고준의 자살이 그것. 전직 대통령의 자살과 같은 날짜. 이 경우 소설적 장치에 주목할 것. 전직 대통령이 유서를 남겼는데 독고준은 일기를 남겼다는 것. 그 일기(1960. 4. 28~2007. 12. 29)란 30권 분량.
문제는 일기의 첫 번째 독자에서 오오. 40대 중반의 영문학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독고원. 바로 독고준의 맏딸. 이 딸을 좀 보소. 일기를 읽으며 촘촘히 논평을 가하고 있소. 때로는 난감하게, 때로는 용감하게, 또 때로는 응석받이로. 그야 어쨌든 부전여전일 수밖에. 무엇이 부전여전인가. 글쓰기가 그것. 동성애 말이외다. 딸의 동성애를 적극 지지한 아비.
알게 모르게 작가 고씨도 이에 깊이 가담하고 있어 보이오. 카뮈, 사르트르, 이에이치(E. H.) 카, 레몽 아롱, 바슐라르, 피카소 등등으로 독고원을 지원해주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독고준의 저 자살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자살 앞에 작가 고씨 또한 모종의 회의에 빠져 있소.
혁명, 자유, 인간다움 등등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것들이란, 독고준이 기대어온 기본율인 자유의지의 소산이라는 것. 그런데 안 그런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스며들었다면 어떻게 될까. 자장면을 시켰을 때 과연 그것이 내 자유의지의 소산인가, 그때의 입맛에 따른 생리적 조건인가. 전자에 기댄 독고준은 자기기만이 아니었던가. 이미 자결한 마당이기에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읽었던들, 하고 안타까워해 봐야 소용없는 일. 권력에의 의지엔 ‘주체’가 없다는 니체의 사상 말이외다.
소설 <독고준>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따로 있소. 소설 주인공을 인격체로 환원시켜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 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의 흉내작들과는 판연히 구별되오. 차라리 그것은 <율리시스>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경우와 흡사하오. 재능 있고 할 말이 많으나 인물 창조에 흥미를 못 가진 작가의 장기라고 할까요. 이때 주목되는 것은 그런 주인공을 가진 우리 소설 쪽이오. <서유기> <회색인>만큼 강렬한 주인공 말이외다.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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