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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운명과의 결탁 없이도 창작이 가능할까

등록 2011-06-17 21:11수정 2011-12-13 16:06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운명에 절대 복종하는 소설에 <백경>(1851)이 있소. 백경을 쫓는 선장 에이허브는 부하들 앞에서 이렇게 외쳐 마지않소. “나는 운명의 부하다. 그 명령에 따른다. 알겠는가. 이것은 바다가 있기 전 태곳적부터 예정된 것이다”라고. 니체는 이렇게 부르짖었소. “당신의 운명은 초인이다”라고.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

이처럼 “나는 하나의 운명이다”라고 외칠 때 이런 목소리는 너무 굉장해서 소설 속으로 들어오긴 어렵소. 한 인간이 낳고 살고 사랑하며 죽었다는 것을 다루는 소설에서는 운명에 번롱당하는 인간으로 가득 차 있음이 보통이오.

이 사실을 썩 그럴듯하게 보여준 소설에 <보바리 부인>(1856)이 있소. 속물인, 시골의사 부인 보바리가 바람피우다 자살한다는 이 시시한 내용의 소설이 고전으로 취급되는 이유란 많겠으나, 시시하다는 것도 그중에 들지 않았을까.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운명’을 들고 나왔소. 아내를 죽게 한 장본인을 향해 남편은 이렇게 말했소. “이게 다 운명 탓이지요!”라고. 작가는 이를 두고 “엄청난 말”이라 했소.

이 나라 근대 소설의 주춧돌의 하나인 <배따라기>(1921, 김동인)는 어떠할까. 형이 보기엔 아내와 동생의 관계가 수상했다. 이른바 삼각관계의 의혹. 분한 아내가 자살. 아우도 가출. 형은 뱃군이 되어 10년 만에 드디어 아우를 만났다. 아우가 말했다. “형님, 거저 다 운명이외다”라고. 그러고 보니 소설 결말치고는 이처럼 시시한 것이 없겠소. ‘다 운명이다’ 또는 ‘팔자다’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루카치도 지라르도 소설 결말의 시시함에 주목, ‘악마적이다’ 또는 ‘아이러니다’라고 했을 정도.

<맨발로 글목을 돌다>(2011, 공지영)는 이를 한번 더 일깨워주었소. ‘글목’이란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을 가리킴인 것. 지금까지 써온 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감일까. 아니면 마라톤 코스처럼 반환점을 돌았음일까. 후자라면 같은 길이 아닐 수 없겠지요. 어느 편이든 ‘맨발’이어야 함에 유의하겠지요. 맨발이란 자기 자신을 가리킴인 것. 사실에 허구 한 조각만 들어가도 전체가 허구가 되어 버리는 글쓰기에서 벗어남을 가리킴인 것.

대담하게도 공씨는 이런 글쓰기를 두고 ‘운명’이라 했소. ‘인생에 운명이 있다’에서 ‘글쓰기에도 운명이 있다’로 된 것. 이를 <토니오 크뢰거>(1903, 토마스 만)에서 배웠다 했소. ‘운명은 성장이다’가 그것. 당초 글쓰기란 미학을 겨냥한 것. 악마와의 결탁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 <최후의 만찬> <백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9교향곡> 등이 그 산물. 토니오 크뢰거도 이 길을 걸었지요. 그러나 그는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소.

맨발로 돌아선 다른 길이란 보통 사람의 길. 평범성이 주는 온갖 기쁨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그리움이 그것. 이렇게 성장해가는 것이 운명이니까. 이렇게 성장해감이 글쓰기의 정도니까. 잠깐, 그렇다면 결국 미의 포기가 아닐 것인가. 미란 타협의 산물일 수 없으니까. <토니오 크뢰거>로부터 44년이 지난 <파우스트 박사>(1947)의 악마가 그 증거. 도로 아미타불이 아니었던가.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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