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전쟁 말기에 일제는 조선인 학병 소집까지 했소. 전문학교 학생, 대학생(사범계, 이공계 제외) 4385명이 일제히 징집된 것은 44년 1월20일. 이가형(교수) 등은 미얀마, 김수환(종교인) 등은 남양, 한운사(극작가) 등은 일본 본토, 장준하(언론인)·김준엽(학자) 등은 중국 행. 이 중 중국 쪽에 탈주병이 제일 많았는데, 6천리를 걸어 임정까지 간 숫자만도 50여명. 환영식장에서 김구 주석께서는 흑 하고 소리 내어 우셨다 하오.
행동은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달랐겠지만 분명한 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는 점. 김준엽의 경우는 거금(집 한 채 값)을 몸에 지녔고, 장준하의 경우는 성경책이었소. 중국 땅 광막한 조밭을 톺아, 동북방 하늘이 밝아올 때 탈출 학병의 얼굴에는 장대한 황혼의 빛깔이 물들었소. ‘조국’이라는 이름의 무대 예술 속의 무언의 연기. 말을 잃을 수밖에. 이 무대 예술의 언어란 무엇인가. 임정 찾는 행로란 이 언어 찾기에 다름 아닌 것.
맨 처음 그것은 ‘등불’이었소. 임정 가는 도중 4개월간 그들이 머문 린취안(臨泉)에서 등불을 켰소. ‘등불’이란 제호 밑에 한반도를 그리고 그 속에 빛나는 램프를 그려넣은 잡지 만들기가 그것. 윤재현의 제안으로 김준엽이 삽화를 그린 <등불>엔 시, 소설, 논문 등이 실렸소. 장, 윤, 김의 합작품. 거적때기 위에서 잠자며 마분지 위에 붓으로 단 한 부 만든 이 ‘등불’을 보시라. 김의 내복을 빨고 빨아 표지를 삼은 것. 2호까지 간행.
이 등불을 들고 파촉령을 톺아 드디어 충칭에 닿았소. 이미 등불은 불필요. 주석께서 거기 계시니까. 그렇지만 딱하게도 등불을 다시 켜야 했소. 어째서? 학병들의 거센 임정 비판 때문이오. 거북해진 이들은 스스로를 추스르기 위해 <등불> 속간에 나아갔소. 등사기가 있어 80부를 낼 정도. 그럼에도 등불은 더 밝아지지 않았소. 그들은 충칭 교외 투차오(土橋)로 옮겨갔소. 숨통이 트였다고나 할까. 여기서 <등불>을 5권까지 냈소.
그래도 등불은 더 밝아지지 않았소. 주석의 친서 ‘장준하 청람’을 받았기 때문.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이 간 곳은 시안(西安)의 이범석 장군 휘하 미군 OSS(미국 첩보대). 훈련소는 시안 교외 두취(杜曲)의 옛 절. 현장법사와 규기 및 신라 왕자 왕측의 송덕비가 있는 곳. 장준하는 여기서 큰 두려움에 휩싸였음에 틀림없소. 이 장군의 보좌관으로 김준엽이 갔기 때문. 이 고독감의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소. 고된 훈련 와중에 그가 한 것이 잡지 <제단>이었소. 나를 바칠 조국의 제단이자 신의 제단. 창간호 300 부. 그러나 이 <제단>도 2호를 제본하지 못했소. 1945년 8월10일, 일본이 포츠담 회담 무조건 수락을 외교 경로를 통해 통고했기 때문.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 쉽소. “누가 그 실물을 보았는가”라고. 김준엽은 이렇게 답했소. “우리가 보물로 여겼던 <등불>지를 장준하 형이 천신만고를 겪으며 국내까지 가지고 들어왔으나 6·25 전란 때 아깝게도 분실하고 말았다”라고. 그리고 한마디 보탰소. <사상계>(1952)라는 잡지를 아시는가, 라고.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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