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정부는 문화 관계 최상급인 금관 문화 훈장을 박경리, 이청준, 박완서에게 수여했소. 생존 시에 이룩한 이들의 업적에 국가가 응분의 경의와 평가를 표했음이오. <무정>(1917), <삼대>(1931), <임꺽정>(1929~1939)을 가진 이 나라 소설 문학이 고도의 내공(內攻)을 갖추게 된 것은 분단 현실과 분리되기 어렵소. <무정>만 하더라도 일본, 중국, 연해주, 미국 등에로 열린 공간 속의 상상력이었소. 그만큼 숨쉴 공간이 있었기에 대중성이 어느 수준에서 확보될 수 있었소. 그러나 반공을 국시(국가 통치 형태)로 한 분단 이후의 상황은 공간을 남한 한 곳에 폐쇄시켰소. 그 폐쇄도에 비례하여 내공의 밀도는 강화 일로. 닿기만 하면 강철 소리가 나거나 화상을 입기에 모자람이 없었소. 이른바 악마적 글쓰기(박경리), 악종의 글쓰기(박완서)라 스스로 말할 지경이었소.
이 내공이 정점에 이른 것의 하나에 <토지>(박경리, 1993)가 있소. <토지>의 무대는 섬진강 동쪽 평사리. 때는 1897년 추석에서 시작되오. 이른바 대한제국 원년. 중국에 복속한 탓에 옥좌 위에 감히 쌍룡을 틀어 올리지 못했던 조선조가 비로소 쌍룡을 번듯이 틀어 올린 시기에 <토지>가 시작되오. 그러나 사직이 송두리째 망했을 땐 어떠해야 했을까. 독립 운동으로 하직 차 최참판 댁 당주 치수를 찾아온 이동진과의 대화에 참주제가 드러나 있소. 둘 다 양반이지만 최치수는 선비일 수 없다는 것. 최참판 댁 만석꾼의 재산이란 백성의 수탈에서 온 것이니까. 이 장면에서 자존심 강한 최치수가 가만히 있었을까. 이동진, 네가 하고자 하는 독립운동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군왕인가? 이동진의 답변은 한마디로 노. 그렇다면 백성인가? 이 역시 노.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이동진 왈, “이 산천(山川)이다!”라고. <토지>를 정독해 보시라. 뻐꾸기 소리가 번번이 산천을 울리고 있소. 그것도 주인공들이 위기에 놓일 때마다. 번번이 산천을 밝히는 능소화의 빛깔이 번득이오. 6백 명에 이르는 인물들이란 이 산천을 자연물과 함께 사는 인간 군상.
이 내공을 문제 삼을 때 박완서의 <미망>(1990)을 또한 들 수 없을까. 나만 억울하다고 쉴 새 없이 외치는 <나목>(1970)을 제치고 <미망>을 내세우는 곡절은 무엇인가. 세대 감각이란 4·19에도 386에도 엄연히 있는 것. 이를 뛰어넘는 곳에 서사 문학의 본령이 있소. <미망>은 <삼대>에 이어진 초기 자본주의 속에서의 개성상인의 상업 자본과 그것이 한 가문의 발전에 어떻게 관여되었는가를 다룬 것. 가장 합리적인 삶의 법도가 거기 섬세히 포착되어 있소.
잠깐, <서편제>(1976, 이청준)의 내공은 어떠했던가. 소리를 위해 스스로 또는 딸의 눈을 뽑아버린 이 전대미문의 육체 파괴 현상은 또 무엇인가. 악마와의 결탁 없이는 불가능한 예(藝)의 극단적 양식이 아니었을까. 이때 생명체의 감수성에 제일 섬세히 육박했겠지만 지적 통제력이 감히 미치지 않는 것. 예술 미달 혹은 초월 현상이 아니었을까.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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