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남의 나라에 여행할 때 누구나 겪는 일. 낯선 언어의 광범한 소음이 그것. 그 나라에 적의를 품지 않는 한 그것이 감미롭게 나그네를 보호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그러할까. 이 물음에 고명한 구조주의자 바르트가 일본 기행 <기호의 제국>(1970)에서 대충 아래와 같은 해답을 제시했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외국어, 그러니까 기이한 국어에 통효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것. 곧 각 국어는 그 자체가 갖추고 있는 구조가 있음을 훤히 알면서도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있다는 것. 각 국어가 갖고 있는 차이를 감지하면서도 그 차이가 전달이나 통속적 이해라는 언어의 표층적 사회 조직에 의해 조금도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 한마디로 번역 불가능인 것 속에로 하강하여 우리의 내부에서 국어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것. 요컨대 번역 불가능한 것의 진동을 감지하여 그것을 결코 감소 또는 쇠약치 않고자 하는 꿈. 그러니까 바르트는 ‘꿈’을 말하고 있었던 것.
이 대단한 구조주의자는 실상은 꿈꾸는 사람이었던가. 거기까지는 알기 어려우나 ‘꿈’만은 짐작할 수 있을 듯하오. 언어 생성의 단계에 진입하면서도 아직 기성 언어에 닿지 않는 상태, 그것이 내부에서 꿈틀거려 표층 언어의 낡고 굳은 껍질을 돌파하고자 하는 꿈 말이외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바 글쓰기란 기성 언어와의 타협 없이는 불가능한 법. 꿈에 비중을 두는 타협이거나 그 반대일 것. 혹시 그 균형 감각의 모색도 가능할까. 이 ‘혹시’에 응해 오는 우리 문학은 어떤 형편일까.
“안녕하세요. 폴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라고 한국계 미국인 청년 폴이 말했소. 습니다체를 아직 못 배운 상태. 그는 시방 한국어반에 들어와 배우고 있소. 여선생은 서른에 이른 ‘나’. 아비가 군인이었던 탓에 전국 곳곳으로 이사하여 유년기를 보냈소. 전학할 때마다 지역 사투리의 억양이 남아 왕따 당하며 자랐고, 지금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원의 강사. 중국인, 일본인, 독일인, 미국인 등이 어째서 한국어를 배우는가. 한국이 이미 다국적 시대에 접어들었으니까. 한국어를 배워 영어 선생이 된 폴의 아비가 미국에서 찾아왔소. 며느리감과 부자가 아비의 고향을 찾아갔다 하오. 지도에도 없는 ‘정산’이란 곳. 대체 그곳이 어디일까. ‘나’는 이를 단박 알아냅니다. “충청도다!”라고. 신진 작가 백수린씨의 <폴링 인 폴>(<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의 줄거리.
어째서 나는 ‘정산’이 충청도에 있는 줄 번개처럼 알아차렸을까. 교포 1세인 아비 밑에 자란 폴이 아니었던가. 폴의 억양 속에는 아비의 충청도 억양이 어딘가에 배어 있었기 때문. 이 억양이란 새삼 무엇일까. 바르트가 말하는 언어 표현 이전의 ‘꿈’이 아니었을까.
이 꿈을 우리 소설은 김연수씨의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2008)에서 잠시 본 바 있소. 한국 남자를 사랑한 미국 여류 작가가 있었소. 그 남자의 유언은 고향을 찾아가고 싶다는 것. 그녀가 아는 것은 딱 하나. 남자의 고향이 Bamme라는 것. 그녀가 찾아낸 곳은 바로 밤뫼, 그러니까 ‘율산’(栗山). 그렇다면 제도권 언어에 무조건 타협하는 꼴이 아니었던가. 앞에서 본 억양에 비해 쉽사리 의미에 복종한 결과니까.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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