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언어를 모르고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나라 문학판에서 이런 물음을 처음으로 던진 비평가가 있었소. 이름은 김현. 첫 평론집 <존재의 언어>(1964)에서 그는 존재, 언어, 허무, 부조리 등을 선험적인 것으로 인식한 마당에서 출발했소. 이오네스코의 <수업>에서처럼 ‘나의 조국은 프랑스다’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면 ‘나의 조국은 이탈리아다’임을 까맣게 몰랐으니까. 이 사실을 깨쳤을 때 그는 돌연 자기를 잃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서정주 시는 한국어다’에로 치달았소. 뒤돌아봄도 없이. 이때 제일 섭섭한 이가 있다면 말라르메가 아니었을까. 모처럼 말라르메의 대문을 가까스로 기웃거리다 도망쳤으니까.
이를 멀찍이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소. 이름은 곽광수. 프로방스의 들판에서 바슐라르를 공부한 그는 물질적 상상력을 천착하는 과정에서 현지 비평계에 앞서 이른바 ‘여가작용’(與價作用)의 중요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수준에까지 육박했소.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비평 <사라짐과 영원성>(1995)이 그 해답. 이 비평은 바슐라르론이자 김현승론이오. 이 균형감각에 또 주목할 것이오. 물방울이나 입김 하나에도 자칫하면 깨질 수 있는 그런 감각이 여기 살아 숨쉬고 있소. 이 아슬아슬한 경지란 그 자체가 장관이긴 하나, 바로 여기가 함정이라고, 한국 문학은 말해야 했소. 현장 비평에로 나아오라는 목소리에 그는 귀 막고 눈감지 않았던가. 김현이 너무 조급했다면 곽광수는 너무 신중했던 것.
이런 물음을 무수히 던지며 마침내 한 가지 답변을 찾아낸 사람이 있었소. 이름은 황현산. 엄격히는 말라르메 번역가. 이론이 아니라 시 작품에 육박하기가 그것. ‘나의 조국은 프랑스다’를 한국어로 번역해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도 사정은 똑같은 것. 드디어 말라르메가 한국어 속으로 왔소.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말이외다. 시인은 낱말들에 주도권을 양도하고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動員) 상태에 놓이고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 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간의 반영으로 점화되는 모습으로 말이외다. 다시 말해 전대미문의 순수함에 이를 때까지 거울을 희박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는 것. 이 순간 시인은 사라지고 낱말들이 허상의 보석처럼 상호의 반영으로 점화된다는 것.
황현산이 겨냥한 것은 말라르메의 시와 산문이었던 것. 또 말해 시 번역과 산문 번역을 허상의 보석처럼 상호의 반영으로 점화코자 했던 것. 요컨대 말라르메가 선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갔던 것. 이제야 이 방식이 조용한 뇌성을 일으켰소. <초현실주의 선언> 번역과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2012)이 그것. 이 조용한 뇌성이 어째서 가능했을까. 또 무서운 것일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것이기에 그러하오. 황현산의 목소리를 들어보시라.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프랑스의 상징주의부터 초현실주의까지의 중요 문헌들을 번역하고 주해하는 작업이다”라고.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일상의 마음의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라고. 현장비평도 당연히 이 사정권 속의 일.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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