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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청춘의 순수 뒤에 감춰진 ‘괴물’

등록 2012-06-10 19:13

“왜 그들은 그토록 메마르고 무지한 정신으로, 왜 그렇게 근본적인 단절의 포즈를 고수했나. 왜 그렇게 동화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을 품었으며 왜 그렇게 자신들의 무효성을 앞당기기 위해 날뛰었던가.”

권여선의 <레가토>(창비)는 아련한 그리움과 고통스러운 회한의 감정을 함께 불러일으킨다. 지난 시절 운동권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청춘의 순수 속에 어떤 괴물이 숨어 있었는지를 아프게 환기시킨다. 순수와 괴물이 청춘의 불가피한 두 얼굴이라면, 어떻게 괴물을 다스려 잠재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한다.

소설은 여주인공 정연의 실종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79학번인 정연은 전통연구회라는 학내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어느 날 문득 자취를 감추어 버린 인물. 그로부터 3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정연의 여동생이라는 하연이 나타나 언니의 흔적을 수소문한다. 학생운동 경험을 혹은 훈장처럼 혹은 상처처럼 간직한 채 기성세대가 된 정연의 동무들은 하연을 만나면서 “카타콤이라 불리던 쾨쾨한 반지하 서클룸에서 지냈던, 사반세기도 더 지난 청춘의 옛 시절”을 새삼 반추해 보게끔 된다.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첫 ‘피세일’(=페이퍼 세일, 거리에서 반정부 유인물 나눠주기)에 나섰던 일, 상시적인 허기에 시달리면서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고된 노동을 소화했던 농활의 추억, 학습과 토론으로 논리적 무장을 꾀하던 골방의 날들, 그리고 마침내 닥쳐온 체포와 구속, 그리고 고문…. 1970, 80년대를 학생운동권과 그 언저리에서 보낸 이들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옛 생각에 사로잡힐 법하다. 적잖은 이들에게 그 시절의 기억은 모종의 자부심을 수반할 테지만, 일찌감치 그 동아리를 박차고 나온 정연의 이런 절규에 대해서는 따로 대답이 필요할 것이다.

“나 카타콤인지 나발인지 거기 가기 싫어. 지긋지긋해. 누가 더 과격한지 내기라도 하듯이 이년(이념연구회) 저년(전통연구회) 무년(문학연구회) 것들이 언제 배웠다고 담배나 죽어라 피워대면서, 담배연기처럼 자욱한 투쟁심이나 과시하는 걸 도저히 못 참겠다. 점점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어.”

물론 정연의 경우는 ‘조금’ 특수했다고 해야 온당하리라. 그가 동아리 회장인 선배 인하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당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했으며 그 때문에 동아리도 그만두고 휴학까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드러나거니와, 학생운동권 투사 출신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그럴듯한 외양 뒤에 짐승과 괴물의 본질을 숨기고 있는 인하야말로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하와 동아리 분위기가 정연을 학생운동의 대오로부터 등 떠밀었다면, 그가 고향 집에 내려와 아이까지 낳은 뒤 겪은 5·18 광주학살의 참극은 그의 실종을 ‘완성’한다. 소설 뒷부분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5·18의 실상은 학생운동권 내부에 대한 문제 제기라는 소설의 핵심에서 벗어난 듯도 하지만, 5·18이 70, 80년대 학생운동의 ‘원죄’와도 같은 지점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소설 속 이야기들이 5·18이라는 클라이맥스로 수렴되는 설정은 일견 수긍할 만하다.

<레가토>는 출간된 지 한 달 정도 된 소설이다. 뒤늦게 이렇게 소개하는 데에는 까닭이 없지 않다. 학생운동 출신 야당 의원들이 “자신들의 무효성을 앞당기기 위해 날뛰”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70, 80년대 학생운동이 지녔던 순수와 괴물의 두 얼굴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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