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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카톡 감청’이 떠올린 영화와 소설

등록 2014-11-06 20:25

최재봉의 문학풍경
카카오톡의 감청과 검열 논란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영화 한편과 소설 하나가 있었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를 소재로 삼은 영화 <타인의 삶>과 칠레 출신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단편 <독자>가 그것이다.

<타인의 삶>의 주인공인 슈타지 요원 비즐러는 정보 요원의 모범과도 같은 인물이다.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인 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그들이 사는 집에 도청 시설을 설치하고 말을 엿듣는다. 영화의 백미는 이 냉혹한 정보 요원이 도청 과정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데에 있다. 도청을 거듭할수록 드라이만 커플의 인간적 사랑과 고뇌 그리고 자유와 인권을 향한 몸부림에 공감하게 된 비즐러는 그들의 ‘범죄’를 고발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몸소 숨기기에 이른다.

“금요일 아침에 원고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그는 이것이 출판금지해야 할 원고라는 것을 알았다.”

독재정권 시절 남아메리카를 배경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 <독자>의 주인공 돈 알폰소는 “검열관으로 단 한건의 실수도 없이 20년의 연륜을 쌓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삶>의 비즐러와 비슷하다. 아니, 사실은 <타인의 삶>과 <독자>의 이야기 구조 자체가 매우 흡사해서 영화를 만든 이들이 선행작인 도르프만의 소설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들 정도다.

알폰소가 읽기 시작한 <변모>라는 소설 원고는 출판사 편집장인 친구가 출간을 앞두고 검토를 의뢰해 온 것이었다. 사전심의제가 있던 이전에 비해 규제가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사후심의제 역시 작가와 출판사의 숨통을 조이기는 마찬가지. 출판사로서는 수천부 책을 찍어 놓고 창고에서 썩히기 싫기 때문에 “이런 정책은 그들을 무자비한 자기검열자로 변하게 만들었다.”

비즐러와 마찬가지로 알폰소 역시 <변모>를 읽으면서 ‘변모’를 겪는다. 소설 주인공인 행정부 관리 호세 코르도바는 외모며 개인사에서 알폰소 자신을 쏙 빼닮았다. “마치 누군가가 그 자신을 그대로 이 책장 위에 옮겨 놓은 듯했다.” 그 코르도바가, 역시 알폰소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여읜 뒤 홀로 키운 아들 에르네스토가 아버지를 찾아와 저항 세력에 모종의 도움을 주도록 요청하는 대목에서 알폰소의 독서는 일단 중단된다. 에르네스토 역시 제 아들 엔리케를 모델로 삼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인 알폰소는 급기야 <변모>를 쓴 젊은 작가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그 남자가 놀랄 만한 격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저토록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여인과 아이들 옆에 서서 지켜보면서 묘하게도 기분이 좋았다”는 대목은 <타인의 삶>에서 비즐러가 드라이만 커플의 삶을 엿보면서 느낀 감정과 일치한다!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알폰소는 결국 제 직권으로 <변모>를 출간하고 검열도 통과시킨 다음,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산다. “선물용으로 포장해 드릴까요?”라 묻는 점원에게 “아뇨, 괜찮소. 그냥 됐소”라 말하고 책을 들고 나오는 장면이야말로 <타인의 삶> 마지막 장면의 데칼코마니라 할 법하다. <타인의 삶>과 달리 <독자>는 알폰소가 민주화라는 결실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무리되지만, 남아메리카 현대사의 전개는 그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감시와 검열이 강시처럼 부활한 시대에 이제 우리는 비즐러나 알폰소 같은 ‘의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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