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대하소설 <태백산맥>(조정래), <남과 북>(홍성원), <지리산>(이병주)의 특징은 6·25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음이오. 이 나라 정부의 공식 명칭이 ‘6·25’라면 북쪽의 그것은 ‘조국해방전쟁’이오. 정작 실전에서는 맥아더와 펑더화이의 전쟁이라고도 하는 만큼 미국은 ‘한국전쟁’,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소. 우리 쪽만 빼고 모두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쪽은 6·25를 ‘동란’, 곧 내전의 일종으로 보았다는 뜻일까.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소.
국제 정치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런 거창한 서두를 들먹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외다. <태백산맥>이 내전(계급 전쟁)의 자리에 가깝게 섰기 때문이오. 우익의 거물인 학도병 출신 김범우에게 소작인 출신 염상진이 이렇게 말했을 정도이오. “너와 나는 피가 다르다”라고. 한편 <남과 북>은 어떠할까. 외신 기자 설경민의 입을 빌려 이렇게 외치고 있소. 로마의 원형 투기장에 선 검투사가 남북이라고.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게임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형국. 이를 안전한 자리에서 구경하는 쪽이 따로 있는, 냉전 체제의 꼭두각시놀음, 갈 데 없는 대리 전쟁 놀음에 우리만 억울하다라고.
두 작품의 입장이 아무리 달라도 다음 한 가지는 공통되어 있소. 전쟁 참상의 묘사가 그것. 미증유의 전쟁에 방비 없는 알몸으로 노출된 남북 민중들의 참상에 대한 그 필봉의 철저함과 예리함은 그것을 대하면 독자치고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만큼 힘을 가지고 있소. 바로 이 점이 두 작품의 한계랄까 제약이 아니었을까.
이런 물음에 <지리산>이 가까스로 대답하고 있소. 곧 이데올로기 문제가 그것. 어째서 공산주의 쪽에 서야 했을까. 공산주의란, 그게 무엇이든 이데올로기의 일종이 아니겠는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남도부(하준수), 박태영이 죽어가면서 느낀 것은 ‘허망한 정열’이었던 것. 도스토옙스키가 그린 황금시대의 꿈의 일종이었던 것. <지리산>이 지식인에게 읽힌 것은 이 관념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관념성의 한계도 뚜렷하오. 묘사의 부재가 그것. 봉우리와 봉우리를 건너뛴 형국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속성에 흡수되기 마련이겠소.
<태백산맥>과 <남과 북>이 새삼 빛나는 것은 이와 대비되기 때문. 곧 묘사의 힘에서 오오. 이 점에서 두 작품을 견주어 보면 또 어떠할까요. <태백산맥>의 배경은 전남 벌교. 확실한 지역성을 갖고 있소. 거기서 자란 인물들이 6·25를 겪지만 결국 벌교로 귀환하오. 요컨대 뿌리가 확고한 까닭이오. <남과 북>은 이 점에서 취약하오. 포수 집안의 막내인 명소총수 박노익 상사가 휴전이 되자 약삭빠르게 돈벌이에 나섰고, 그 때문에 오발 사고를 일으켜 중대장 한 대위를 죽게 만들지요. 죽어가면서 한 대위가 내뱉는 말, “아니야, 아니야”로 <남과 북>이 끝납니다.
이렇게 읽고 있자니 “너와 나는 피가 다르다”도, ‘허망한 정열’도, “아니야, 아니야”도 이 나라 서사 문학의 금자탑이 아닐 것인가.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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