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화부 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요즘은 안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헛소문일지도 모른다”(윤후명 <소설가 Y씨의 하루> 앞부분과 뒷부분)
소설가 Y(와이)씨가 예전에 시를 썼다는 것은 헛소문이 아니다. 그는 시집 두 권을 낸 바 있다. 등단 10년 만에 낸 첫 시집 <명궁>(1977)에는 본명인 ‘윤상규’의 이름이 붙었고, 두 번째 시집 <홀로 상처 위에 등불을 켜다>(1992)는 ‘윤후명’이라는 필명을 내세웠다. 그렇다. 윤후명의 시 <소설가 Y씨의 하루>는 그 자신의 이야기다.
첫 시집을 낸 이태 뒤에 그는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다시 등단했다. 시와 소설을 겸하게 된 것인데, 첫 시집 이후 두 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15년의 세월이 걸린 데에서 보다시피 그 사이 그는 시보다는 소설에 주력해 왔다. 속되게 비유하자면, 조강지처보다는 애첩이 더 사랑스러웠던 셈이랄까. 어느덧 ‘시인 윤후명’보다는 ‘소설가 윤후명’이 더 자연스럽게 들리게끔 되었다.
그 윤후명이 두 번째 시집 이후 다시 20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앞서 인용한 시 <소설가 Y씨의 하루>가 포함된 시집 <쇠물닭의 책>(서정시학)이 그것이다. 같은 시집에 실린 시 <고래의 일생>에서 그는 “1969년에 ‘고래’라는, 태어나지도 않은 시 동인지가 있었다”는 사연을 소개하는데, ‘고래’란 “조선일보 당선 시인 임정남이 모임에서 내놓은 이름”이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대신 ‘70년대’가 동인지의 이름이 되었다. 1969년 4월25일 발행된 창간호에는 강은교 김형영 박건한 윤후명 임정남이 참여했고, 그 뒤 정희성과 석지현이 동참했다. 1973년 6월4일로 활동을 멈춘 70년대 동인이 그로부터 40년 만에 최근 합동 시집 <고래>를 펴냈다. 여기에는 작고한 임정남과 오래 시를 쓰지 못한 박건한을 제외한 나머지 동인들이 참여했다. 윤후명도 신작 시를 보탰다. 그렇다. ‘시인 윤후명’이 돌아온 것이다!
“화염산의 옛 원숭이 그림자를 바라보며/ 비단길 토루(土壘)에서/ 한 잔 포도주에 머리를 기댄다/ 로울란(樓蘭)의 모래밭에 스민/ 내 아득한 삶길/ 으깬 포도알 같은 추억/ 사막 아지랑이의 신기루가 향기를 뿜는다/ 사랑은 이토록/ 세상 끝에 이르는 길이다”(<눈망울> 부분)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사랑의 길> 전문)
돌아온 시인 윤후명의 시들은 그의 소설을 닮았다. 여로형 구조 속에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소설 무대였던 화염산과 비단길, 로울란을 시를 통해 다시 만나는 느낌이 각별하다. 이곳과 저곳, 현실과 환상을 포개 놓는 기법을 통해 존재를 확장 및 심화시키는 윤후명 득의의 방법론이 새삼 반갑다. 이런 식이다.
“낙타가시풀 듬성듬성한 초원으로/ 양 떼를 몰고 가는 사내/ 나인지도 모른다/ 천산 아래 양고기 꼬치를/ 굽는 사내/ 나인지도 모른다/ 허리춤에 단도를 꽂고/ 먼 사막 해 지는 걸 좇아/ 어디론가 가는 사내/ 나인지도 모른다/ 옛날 바다였다는/ 돌소금 깔린 황량한 광야/ 한 마리 들짐승처럼/ 나는 헤매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부르기 위하여”(<나인지도 모른다-중앙아시아의 고원에서·2> 전문)
최재봉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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