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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비극적 조건 인식한 인간이 현실 바꾸도록 하는 게 문학”

등록 2013-01-15 20:23수정 2013-01-18 17:13

새 길을 여는 한국의 인문학자들
② ‘인간 존재’ 탐구한 영문학자 임철규
‘쓰고자’ 하는 학자의 의지는 작은 계기로도 불현듯 불타오른다. 그리스 비극을 비롯해 인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삼아 자신만의 사유를 펼쳐온 임철규(74)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펴낸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학술 저작일 거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 뒤 그는 경남 김해에 있는 누이 집에 머물며 ‘내가 만난 사람들’이란 주제로 산문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달 말 <한겨레>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은 뒤 갑자기 새로운 책에 대한 착상과 의지가 일어났다고 한다.

11일 서울 신촌 연세대 중앙도서관 5층에서 만난 임 교수는 만나자마자 새 책에 대한 생각부터 풀어놓았다.

“시인 호메로스가 원초적으로 정초했던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 르네상스 뒤 문학작품들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연구하는 책이 될 것 같아요. 셰익스피어·카프카를 비롯해 베케트·도스토옙스키·박경리 등 동서양 고전들을 두루 살펴볼 작정입니다.”

임 교수는 그리스 비극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영문학자’란 틀로 묶기 어려운 학자다.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1983), <왜 유토피아인가>(1994), <눈의 역사 눈의 미학>(2004), <그리스 비극>(2007), <귀환>(2009), <죽음> 등 그의 모든 저작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 문학을 비롯해 철학·정신분석학·역사학·미학·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백과사전적 지식’을 동원해 마치 수를 놓듯 자신의 사유를 촘촘하게 짜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모든 연구를 망라하는 ‘인문학자’란 호칭이 잘 어울린다.

“외국 문학을 전공하면 인물 중심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강한데, 저는 <왜 유토피아인가>에서부터 ‘주제 중심’으로 가려고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가 11일 서울 신촌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자신의 학문적 여정과 새로 준비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서 4000여권을 모두 도서관에 기부한 임 교수는, 봐야 할 책이 있으면 도서관을 찾아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가고 도서관에 없는 책은 늘 구매 신청을 해둔다고 했다. “도서관 덕분에 보고 싶은 책은 실컷 본다”며 그는 웃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가 11일 서울 신촌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자신의 학문적 여정과 새로 준비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서 4000여권을 모두 도서관에 기부한 임 교수는, 봐야 할 책이 있으면 도서관을 찾아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가고 도서관에 없는 책은 늘 구매 신청을 해둔다고 했다. “도서관 덕분에 보고 싶은 책은 실컷 본다”며 그는 웃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그리스 비극에 대한 이해 바탕
‘인간 존재의 비극적 현실’ 연구
문학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애도’

한국전쟁 때 본 빨치산 죽음이
비극적 현실 인식의 출발점 돼
“한국 근현대 굴곡 경험했기에
서양학자엔 없는 절실함 있어”

노 전 대통령 자살 뒤 쓴 ‘죽음’
산 자는 절대 경험할 수 없기에
성찰 통해 우리 삶 이야기해야

임 교수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70년대 후반은 유신 말기이자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다. “‘리얼리즘’에 뿌리를 둔 참여문학을 말하는 것이 그 시대의 상”이었다. 지식인의 참여 의식을 논한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다만 1977년 전공 분야가 각각 다른 동료들과 함께 계간 <현상과 인식>을 창간하는 등 그때부터 이미 ‘학제간 연구’에 남다른 힘을 쏟았다고 한다.

“박동환(철학)·오세철(경영학)·박영신(사회학) 선생과 함께 만든 잡지인데, 그때 활동이 어떤 주제에 대해 사회학·철학·문학·신학 등으로 다양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검토하는 데 훈련이 됐죠. 또 학교 도서관에서 신간 구매 신청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나일 정도로 그때 폭넓게 읽은 책들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임 교수가 평생 다뤄온 주제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현실’이다. 그리스 비극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그는 인간 존재 자체는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비극적 조건 속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 안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애도’라는 것이다.

“위대한 문학은 발터 베냐민의 말대로 억압과 착취 속에 망각된 존재들을 다시 불러내어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합니다. 이를 통해 치유와 위로를 주고, 자신의 비극적 조건을 인식한 인간이 현실을 적극 바꾸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가도록 해주기도 하죠.”

무엇보다 임 교수 스스로 인문학자로서 내세우는 강점은 ‘사유의 독창성’이다. 그는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눈의 ‘보는, 욕망하는’ 기능과 ‘눈물을 흘리는’ 기능을 대비시켜, 인간 존재의 구원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성 안에서 파국을 끝없이 유예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논한다. <왜 유토피아인가>에서는 베냐민과 루카치, 해방신학, 박노해 시와 <장길산> 등을 함께 읽으며, ‘천년왕국’ 같은 이상향이 아닌 ‘희망의 원리’로서 유토피아의 의미를 말한다.

“<그리스 비극> 같은 저작은 국외에선 결코 나올 수 없다고 자부합니다. 서양학자들의 연구로부터는 어떤 ‘절실함’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내 글은 분단과 전쟁, 표류와 귀환, 죽음과 고통 등이 역사적 경험으로 생생히 살아 있는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글입니다.”

최근 저작인 <죽음>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런 고민과 성찰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이 책을 저술한 배경에는 2009년 5월 갑작스레 맞게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간 존재의 비극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은 늘 마음속에 담아두어 온 주제였다고 한다. 그는 서문에서 어린 시절 한국전쟁 당시 봤던 빨치산의 비참한 죽음이 비극적 현실 인식의 출발점이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또 이 책에서 임 교수는 서양에서 자살을 찬성하거나 반대했던 역사적 맥락,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카토의 죽음과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비교,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 본능, 하이데거 철학의 죽음에 대한 인식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죽음을 탐구한다. 인간의 삶이 저주받은 것이라면,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죽음은 ‘선’이 아닌가? 그렇지만 죽음은 산 자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다. 그래서 임 교수는 죽음에 대한 성찰로, 우리의 직접적 경험에 맞닿아 있는 ‘삶’을 이야기하자고 제안한다.

영문학자 프레드릭 제임슨처럼 스스로를 “‘노년 세대’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임 교수는 새 저술 계획에 무척 들뜬 듯 보였다.

“호메로스 이후 수많은 문학가들에 의해 쓰인 작품들은, 이미 호메로스가 ‘인간’에 대해 던진 물음에 그들 나름대로 답을 던지는 ‘자기고백’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질문과 답이 어떤 형태로 이어져왔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겠죠. 제목을 붙이자면 <고전-인간의 계보학> 정도가 될 듯합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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