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길을 여는 한국의 인문학자들
⑤ 신라사경 연구하는 국어학자 정재영
⑤ 신라사경 연구하는 국어학자 정재영
“이 글자 옆 구석을 잘 좀 봐주세요. 뭔가 있어요! 어? 이게 무슨 모양이지?”
치열한 눈씨름과 소곤거림의 연속이었다. 어둑어둑한 암실 안에서 정재영(56) 한국기술교육대 교수(국어학)와 한국·일본의 동료 학자들은 시종 눈빛을 번득거렸다. 빛을 한 방향으로 내쏘는 특수장비인 ‘스코프’의 희미한 불빛이 그들 눈길 아래 놓인 옛 두루마리 불교 사경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신라 승려들이 손수 글로 써서 옮겼다는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화엄경>. 향수 뿌린 닥종이로 만들어 지금도 지질이 생생하다는 이 경전 한구석에 확대경을 대고, 글자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불경의 한문 구절을 고대인들이 독송하거나 읽을 때 그 뜻을 쉽게 풀어 읽기 위해 달아놓는 독특한 발음부호, 이른바 구결 문자를 끝이 뾰족한 도구로 눌러 표시한 각필 흔적을 찾는 과정이었다. 원로 불교서지학자인 고바야시 요시노리 선생(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이 흐트러짐 없이 두루마리를 말고 펴보일 때마다 긴장감이 흘렀다. 글자를 주시하는 학자나 기록하는 보조원들까지, 그렇게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지난달 28일 일본의 고도 나라의 고찰인 ‘도다이사’(동대사) 경내 도서관. 정재영 교수를 비롯한 한국 불교사경 연구자들과 고바야시, 사카에하라 도와오 도다이사 연구소장 등 일본 학자들이 모여 신라 승려가 불경 원본을 일일이 필사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절 소장 <화엄경> 사경(권 12~20)의 글자 분석에 몰두하고 있었다. 21~31일 교토와 나라 등지의 고찰·박물관 등을 돌며 각 소장처의 옛 사경 속 신라 각필 흔적을 찾으러 온 이들의 연구 현장은 책과 문헌자료들을 뜯어보는 여타 인문학자의 작업실과는 판이하다. 눈에 힘을 주고, 희미한 스코프 불빛에 기대어 각필을 종이에 눌러 표기한 어렴풋한 흔적을 공들여 찾는 것이 핵심이다. 한 학자가 흔적을 찾더라도, 다른 학자 눈에 띄지 않으면 착오일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각필 부호를 확인했다는 것을 교감하고 기하학적 모양새 또는 한자를 단순화한 갖가지 부호의 꼴에 대해서도 합의해 기록으로 남기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모래 속 바늘 찾기라고 보면 된다”고 정 교수는 웃으며 설명했다.
2010년부터 학술문화진흥재단 지원을 받아 그와 동료들이 함께 이끌어온 사경연구 팀은 20명을 넘는다. 선학인 남풍현 단국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권인한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와 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 불교학자인 최연식 목포대 교수, 보존과학 전문가인 박지선 용인대 교수, 그리고 일본 쪽에서는 고바야시, 사카에하라 등 현지 원로·중견 사경 연구자들이 두루 참여하고 있다. 프로젝트 제목은 ‘신라 사경에 대한 학제적 연구’다. 도다이사 등 일본 현지 소장 사경을 탐색하고, 재질·내용 등을 분석해 신라 진본임을 확정하고 다른 후대본 사료와 대조하면서 신라인들이 썼던 고대어의 실체를 각필 분석으로 파악하는 것이 목표다. 정 교수는 “각필 흔적을 찾는 것은 고대 서사문화 교류사를 복원하기 위한 기본 작업”이라고 말한다. 신라인들 특유의 어휘 체계를 파악함으로써 이 사경이 신라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전파됐다는 증거를 찾고, 밀접했던 불교 지성사 교류의 단면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신라 승려들이 옮겨 쓴 불교 경전
특수장비 ‘스코프’ 불빛 통해 정독
한문 뜻 읽기 위해 고대인 사용한
독특한 발음부호 각필 흔적 찾아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통일신라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국보인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보이듯 우리의 고대 서사 문화는 세계적 수준이었지만, 국내에 현전하는 사료는 거의 없어요. 오히려 고대 사경만 만 점 이상 남아 있는 일본이나, 둔황(돈황) 등에 막대한 사경이 전해지는 중국 등을 찾아가 연구를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해외에 이름 없이 묻힌 우리의 고대 사경을 발굴하는 것이 현재 가장 시급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는 연구팀 결성 이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고사경을 소장한 일본 각지의 사찰 및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현지 사경을 꾸준히 조사해왔다. 학술 협약을 체결한 도다이사의 전폭적 협조 아래 진행중인 이번 신라 사경 프로젝트도 이런 그의 오랜 노력 끝에 빛을 발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와 동료들은 3년간의 연구로 모든 사경 연구가 끝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본에 전해지는 고사경 중 신라 사경 가능성이 있는 사료들을 최대한 발굴해 국내 연구 기반을 다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에 전해지는 옛 사경들은 자료 조사 자체가 힘들어요. 절 등의 소장처를 수소문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찾을 수밖에 없어요. 오랫동안 소장처 사람들과 인연을 유지해야 하고, 꾸준히 조사해서 성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기네 나라 사경인지 불명확하므로 우선 조사 순위에서도 밀리고…. 속이 뒤집어질 때가 많아요. 분명히 일본 소장처에 신라 사경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고본이 있는데, 공개를 거부해 조사를 못할 때도 많거든요.” 국내에 없는 사료 발굴·분석 위해
한·일 학자들 일본서 3년째 연구
“생색 안 나는 일 왜 하느냐 묻지만
한·중·일 불교 교류 밝히고 싶어” 신라 사경의 존재를 확정하고 각필 등의 연구 자료를 축적하면, 불교사·음악사·미술사 등 당대 여러 분야에 대한 심층 연구도 가능해진다. 정 교수 팀은 이를 위해 올해 중에 그간 연구했던 도다이사 소장의 신라 옛 사경 <화엄문의요결>에 대한 분석자료집 4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신라 승려 표원이 지은 불교개설서를 필사한 이 사경은 최근 정 교수 팀의 분석 결과, 일본 문자 ‘가나’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신라 각필 부호들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새 자료집은 이런 분석을 담은 논문집과 역주서 2권, 각필로 새겨진 자형·부호 집성 등으로 구성된 첫 성과물이 된다. “열심히 해도 거의 생색도 안 나는 일을 왜 하느냐고도 합니다. 하지만 긍지와 사명감은 남달라요. 불교 사경은 당대 최고의 지적 유산이거든요. 사경 탐구를 통해 평화와 상생의 문화권을 구축했던 7~9세기 한·중·일 불교 교류의 실상을 밝히는 건 후대에도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과업입니다. 사경들 글자 더미 속에서 고대인들의 생생한 언어를 발견할 때의 희열도 빼놓을 수 없고요. ” 일주일 넘게 진행된 이번 조사는 수확이 쏠쏠했다. 도다이사 사경 조사에서 10여자의 새 각필 부호를 찾아냈고, 앞서 교토국립박물관에서 벌인 9~10세기 일본 사경 <금광명최승왕경>의 주석본 조사에서도 생소한 신라 승려 경흥, 승장의 주석들을 찾아냈다. 짧은 기간에 비하면, 의미있는 성과라고 자평한 정 교수는 “조사 때마다 딱 부러진 성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일본에 조사하러 갈 때마다 한국학의 새 광맥을 캔다는 다짐을 언제나 되새기곤 한다”고 했다. 씩씩하게 도다이사 도서실을 걸어나오는 그의 어깨너머로 세계 최대 목조건축물이라는 이 절 대불전의 우람한 자태가 겹쳐졌다. 일본 나라·교토/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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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교수가 일본 나라 도다이사 도서관 암실에서 이 절에 소장된 신라사경 <화엄경>(권9)의 글자들을 분석하고 있다. 주요 글자들 옆에 뾰족한 도구(각필)로 눌러 새긴, 옛 신라 특유의 한문 읽기 방식인 구결 부호의 흔적을 찾는 작업이다.
특수장비 ‘스코프’ 불빛 통해 정독
한문 뜻 읽기 위해 고대인 사용한
독특한 발음부호 각필 흔적 찾아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통일신라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국보인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보이듯 우리의 고대 서사 문화는 세계적 수준이었지만, 국내에 현전하는 사료는 거의 없어요. 오히려 고대 사경만 만 점 이상 남아 있는 일본이나, 둔황(돈황) 등에 막대한 사경이 전해지는 중국 등을 찾아가 연구를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해외에 이름 없이 묻힌 우리의 고대 사경을 발굴하는 것이 현재 가장 시급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는 연구팀 결성 이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고사경을 소장한 일본 각지의 사찰 및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현지 사경을 꾸준히 조사해왔다. 학술 협약을 체결한 도다이사의 전폭적 협조 아래 진행중인 이번 신라 사경 프로젝트도 이런 그의 오랜 노력 끝에 빛을 발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와 동료들은 3년간의 연구로 모든 사경 연구가 끝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본에 전해지는 고사경 중 신라 사경 가능성이 있는 사료들을 최대한 발굴해 국내 연구 기반을 다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에 전해지는 옛 사경들은 자료 조사 자체가 힘들어요. 절 등의 소장처를 수소문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찾을 수밖에 없어요. 오랫동안 소장처 사람들과 인연을 유지해야 하고, 꾸준히 조사해서 성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기네 나라 사경인지 불명확하므로 우선 조사 순위에서도 밀리고…. 속이 뒤집어질 때가 많아요. 분명히 일본 소장처에 신라 사경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고본이 있는데, 공개를 거부해 조사를 못할 때도 많거든요.” 국내에 없는 사료 발굴·분석 위해
한·일 학자들 일본서 3년째 연구
“생색 안 나는 일 왜 하느냐 묻지만
한·중·일 불교 교류 밝히고 싶어” 신라 사경의 존재를 확정하고 각필 등의 연구 자료를 축적하면, 불교사·음악사·미술사 등 당대 여러 분야에 대한 심층 연구도 가능해진다. 정 교수 팀은 이를 위해 올해 중에 그간 연구했던 도다이사 소장의 신라 옛 사경 <화엄문의요결>에 대한 분석자료집 4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신라 승려 표원이 지은 불교개설서를 필사한 이 사경은 최근 정 교수 팀의 분석 결과, 일본 문자 ‘가나’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신라 각필 부호들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새 자료집은 이런 분석을 담은 논문집과 역주서 2권, 각필로 새겨진 자형·부호 집성 등으로 구성된 첫 성과물이 된다. “열심히 해도 거의 생색도 안 나는 일을 왜 하느냐고도 합니다. 하지만 긍지와 사명감은 남달라요. 불교 사경은 당대 최고의 지적 유산이거든요. 사경 탐구를 통해 평화와 상생의 문화권을 구축했던 7~9세기 한·중·일 불교 교류의 실상을 밝히는 건 후대에도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과업입니다. 사경들 글자 더미 속에서 고대인들의 생생한 언어를 발견할 때의 희열도 빼놓을 수 없고요. ” 일주일 넘게 진행된 이번 조사는 수확이 쏠쏠했다. 도다이사 사경 조사에서 10여자의 새 각필 부호를 찾아냈고, 앞서 교토국립박물관에서 벌인 9~10세기 일본 사경 <금광명최승왕경>의 주석본 조사에서도 생소한 신라 승려 경흥, 승장의 주석들을 찾아냈다. 짧은 기간에 비하면, 의미있는 성과라고 자평한 정 교수는 “조사 때마다 딱 부러진 성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일본에 조사하러 갈 때마다 한국학의 새 광맥을 캔다는 다짐을 언제나 되새기곤 한다”고 했다. 씩씩하게 도다이사 도서실을 걸어나오는 그의 어깨너머로 세계 최대 목조건축물이라는 이 절 대불전의 우람한 자태가 겹쳐졌다. 일본 나라·교토/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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