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화부 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같은 계유년 생인 고은과 나는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었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통하는 천재였다. 고은은 매일 청진동 옥탑방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점심때면 둘이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고, 밤이면 함께 술집으로 향했다.”(박맹호 <박맹호 자서전 책>)
“우리는 늘 의견이 같다. 그의 마음속에 내가 있고 내 마음속에 그가 들어 있다. 감각의 합치. (…) 민음사에서 박맹호와 함께 시의 대련(對聯)처럼 마주 앉았다. 거기에 액자와 같은 최인훈이 왔다. 셋이 있었다.”(고은 <바람의 사상>)
박맹호 민음사 회장과 시인 고은이 최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펴낸 자전 성격의 책에서 서로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박 회장의 책은 제목 그대로 자서전이고, 고은 시인의 책은 1973년부터 1977년까지의 일기를 묶은 것이다. 인용한 일기는 1973년 6월14일과 18일치. 박 회장의 자서전에서 회고하는 시기와 포개진다. 1933년생으로 올해 만으로 팔순에 이른 두 원로의 우정이 아름답다.
<…책>과 <…사상>은 두 동갑내기의 끈끈한 우정과 함께 지난 시절 문단과 출판계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미덕 또한 지닌다. 두 사람의 책에서 서로에 대한 언급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다.
“고은을 비평적으로 높이 평가한 이가 김현이었고, 그들 둘 사이는 매우 친밀했다. 점차 김현과도 출판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김현의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참 재간이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잘 웃고 상당히 포용력이 컸으며 붙임성도 좋았다.”(<…책>)
“김현과 만났다. 그와의 얘기는 끝이 싫다. 민음사는 점점 인문적인 분위기가 익어 간다. (…) 김현이 나더러 육친이라 했다. 나도 그더러 육친의 육친이라 했다. 우리가 부를 노래를 하나 짓자 했다. 웃음소리가 바람벽을 뚫었다. (…) 김현과 시인선 필자 골랐다. 의견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김현과는 의견 이전에 하나이다.”(<…사상>)
시인의 일기에서 언급된 ‘시인선’은 민음사에서 1973년 12월에 첫선을 보인 ‘세계 시인선’을 가리킨다. 주요 외국 시인들의 대표작을 새롭게 번역하고 원문과 함께 싣는 기획이었는데, 고은과 김현은 각각 <당시선>과 폴 발레리 시집 <해변의 묘지> 번역자로 함께 참여했다. 두 사람은 단순히 번역자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번역 대상 작품과 번역자를 선정하는 일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김현을 비롯한 ‘문학과지성’ 그룹이 민음사를 근거로 출판 기획 및 비평 활동을 하다가 별도의 출판사를 차려서 독립하려 하자 박 회장이 민음사에서 내려던 <겨울 여자>(조해일)를 기꺼이 양보하면서 젊은 비평가들을 격려하는 장면도 미쁘다.
고은 시인의 일기에서는 1970년대 문단 인사들의 특징을 잡아내는 시인의 눈썰미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는 웃음이 잘 발달하지 않았다”(이청준), “활판인쇄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은 그의 걸음걸이도 반가웠다”(최인훈), “긍정의 무한 반복이 그의 표정이다”(정현종), “밤에 황석영의 소설 하나 읽었다. 그놈 기막힌 놈이다”(황석영), “그는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이어령) 등등.
문단과 출판계를 대표하는 두 원로의 자전적 회고담은 독자로 하여금 수십 년 저쪽으로 흘러가 버린 지난 시절 우리 문화계의 현장에 함께 들어가 있는 듯한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최재봉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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