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화부 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작가 박인홍은 지금은 거의 잊힌 이름이다. 1983년 무크 <우리 세대의 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두 권의 소설집 <벽 앞의 어둠>(1989)과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1994)를 펴냈다. 소설집 이외의 책으로는 영화와 독서 에세이 등을 묶은 <섹스, 깨어진 영상 그리고 진정성>(1999)이 유일하다. 민중문학의 기세가 등등했던 1980년대에 그는 관념적이며 형식실험적인 소설을 고집하면서 시류에 맞섰다. 비슷한 계열인 이인성·최수철 등과 한데 묶여 논의되고는 했다. 작품 바깥에서는 동년배 문인 이창동·최인석·김사인과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는 일이 잦아 ‘거지 4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두 번째 소설집 이후 신작을 내놓지 않던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단편을 발표했다. 봄호로 창간된 <소설문학>에 실린 <흰 색에 가까운 옅은 회색>이 그 작품이다. 등단 30년을 맞는 해에, 절필 아닌 절필 20년 만에 새로 만나는 작품이라 우선 반갑다.
<흰 색에 가까운 옅은 회색>은 어느 날 문득 세상 모든 사람이 사라져 버리고 주인공 한 사람만 남게 되는 상황을 그린다. 그렇지만 과학적 종말론이나 재난을 극복하려는 시도의 (불)가능성이라는 에스에프적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계가 0시0분을 가리키며, 낮과 밤의 변화가 불분명해지고, 꽃이 시들거나 잎의 색깔이 더 짙어지지도 않으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음식이 상하지 않는다는 설정, 거리의 차량들이 달리다가 멈춘 채로 사람만 감쪽같이 사라졌을 뿐 시동을 걸면 다시 움직인다는 상황 등을 과학적 개연성으로 설명하기는 난망한 노릇이다. 작가의 의도는 ‘세상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혼자 남은 사람’의 철학적·존재론적 고민에 독자를 입회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사내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나’ ‘너’ ‘그’로 변화무쌍하다는 점은 과연 박인홍 소설답다. 소설의 주요 무대는 그가 운영하는 지하 카페.
“스무 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카페, 손님이 한 명도 없는 텅 빈 카페 안쪽 계산대 뒤에 한 사내가 앉아 있다. 그는 거의 줄담배를 피우다시피 하며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천장 구석에 달아 놓은 스피커 네 개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느린 곡조는 오히려 적막을 더할 뿐이다.”
박인홍은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 신촌 로터리 근처에서 ‘향’이라는 이름의 지하 카페를 운영했다. 동료 문인들이 주 고객이었다. 소설에 묘사된 카페와 주변 정황은 그의 ‘향’ 시절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어쨌든.
주인공은 평소 “지구라는 행성의 사람 세상은 그저 경멸의 대상일 뿐”이라는 염세적인 신조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 그러니까 인간 종의 대표자이자 증인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내가 사람 문명의 마지막 증인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는 것은 왜일까? 견딘다는 것은 부질없고 무모하고 허망한 짓거리일 뿐이다. 지금 또다시, 그리고 간절하게, 왜 나인지를 물을 필요도 없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결단밖에 없다.”
그것이 어떤 결단인지 궁금한 독자는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후배 작가 김이은과 나눈 대담에서 작가가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이 언제나 지속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대한 회의를 표했다는 사실을 힌트 삼아 던져둔다.
최재봉 문화부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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