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헤겔의 시선에서 본 신석정
헤겔의 시선에서 본 신석정
비빔밥으로 소문난 전주에 다녀왔소. 설마 비빔밥을 먹으러 거기까지 갔을까. 전주가 자랑하는 석정문학제를 보기 위함이었소. 어째서 전주는 그렇게 석정을 자랑해마지 않는가.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세요”라고 소근거린 시인이 아니었던가. “님께서 부르시면 말없이 재를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의 시인이 아니었던가. 이런 순수 서정적 정조란, 초승달모양 아름다울지 모르나, 따지고 보면 유아기적 사고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 것. 이것만으로는 전주가 그렇게도 자랑해야 할 이유로는 아무래도 좀 모자란다고 하겠지요. 필시 그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을 터. ‘그 무엇’에 대해 석정제전 위원회 고문(한승헌)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었소. 곧 <촛불>이나 <슬픈 목가>의 일부 작품으로 인해 목가적 서정시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에 못지 않게 시인의 다른 면을 더 깊고 무겁게 본다는 것. 대체 그 다른 면이란 무엇일까. <신석정론>(1979)을 쓴 바 있는 나더러 그것을 말해보라 했소.
신석정론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다가 숨이 헉 하고 막히는 한 편의 작품에 부딪쳤던 것으로 회고되오. <봉화>(<문장> 속간호, 1948. 10)가 그것. 목차엔 <야화(夜火)>로 되어 있었소.
“어슴발이 들 무렵에/젊은 놈이 찾아와서/‘누굴 부뜰고 이 좋은 가슴을 터트려 보겠습니까?’/막막한 이야길 듣는 나도/그 젊은 놈에겐 송두리채 붙잡혀줄 수도 없는/서로운 놈인가 보다”
이렇게 서두를 삼은 <봉화>는 대체 무엇인가. 그 ‘젊은 놈’이란 과연 누구인가. 슬픈 목가의 시인이자 촛불의 시인이 봉화(횃불)를 노래함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고는 ‘신석정론’을 쓸 수가 없었소. 방도가 없어 시인에게 직접 질문지를 보낼 수밖에. 답장이 없었소. 그 대신 <산의 서곡>(700부 한정판 중 267번)이 우송되어 왔소. 활화산처럼 폭발 직전의 산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회고되오. <꽃덤풀>(1946)과 <심판>(1947)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또 문학가동맹 주최 ‘전조선문학자대회’(1946. 2. 8~9)에 13번째로 출석한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봉화>를 해명하기엔 역부족이었소. 이 난관에서 머뭇거릴 때 허소라 교수로부터 자료 몇 편을 받게 됐소. 그 속엔 <슬픈 서백리아>(1940. 4)가 들어 있지 않겠는가. ‘소년 백(伯)이에게 주는 시’라는 부제를 단 이 작품에서 비로소 <봉화>의 그 ‘젊은 놈’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겠는가. 누구처럼 해인사나 다솔사 또는 원정사에도 가지 않고 변산반도 고향에 땅을 파며 있던 촛불의 소년은 실상은 목가는커녕 눈보라 휘날리는 시베리아로 떠났던 것. “입술을 깨물면서 떠나는 백이는 소년이면서 벌써 소년은 아니었다.” 그 소년이 해방공간에서 ‘젊은 놈’으로 되돌아왔던 것.
촛불의 시인은 당초부터 횃불(봉화)의 시인이었음이 이로써 분명해지지 않겠는가. 그는 커다란 참여시인이었던 것. 이로써 신석정론을 쓸 수 있겠는가. 물론 없지요. 논리적 해석이 요망되었기 때문. 앞이 막히면 내가 자주 찾던 헤겔에게 물어볼 수밖에. 어째서 중국의 역사엔 ‘지속의 국가’로 시종하여 변증법적 발전이 없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헤겔이 지적한 것은 가부장제가 그 근저에 놓여 있어 내적 발전이 불가능했다는 것.(<역사 속의 이성>) 논어의 표현으로 하면 ‘君君, 臣臣, 父父, 子子’(왕은 왕다워야 하고 신하도 그러해야 하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의 계층적 서열이 고정되어 있기에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아들(소년)은 집안에 있는 한 소년(유아기적 몫)일 수밖에. 그 아들이 어른이 될 수 있는 순간은 외부에 나아가 싸울 때뿐. 그러나 다시 귀가하면 여지없이 소년일 수밖에.
목가의 시인이자 촛불의 시인도 이와 흡사합니다. 농경사회 상상력에 묶여 있는 소년의 어른 되기란, 외부세계(이데올로기)로 나아갈 때뿐입니다. 소년은 은밀히 어른 되기에 골몰했던 것이죠. 그러기에 신석정 그는 어른이었습니다. <산의 서곡>이 이를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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