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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설] 삶을 담아내는 쿄토의 집/안치운

등록 2006-06-15 20:25수정 2006-06-16 14:58

오래된 집, 오래된 골목, 오래된 장비 오래된 사람들이 하나로 묶여 있었다
숨결이 느껴지고 숨이 멎는 듯했다 아, 이런 것이 생이지
지난 주 일본의 오래된 도시, 교토에 있었다. 그곳은 오래된 도시였는데, 오래된 집과 오래된 골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듯했다. 도착한 후 두 개의 열쇠를 받았다. 하나는 방 열쇠였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 열쇠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줄곧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많았고, 공기가 서울보다 훨씬 맑고 깨끗했다. 교토의 건물들은 고전에서 현대까지 망라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교토의 건축 MAP(지도)>이란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건축을 좋아하는 내게 교토는 읽어야 할 책과 같아 좋았다. 왜 많은 이들이 교토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이틀째 되는 날, 발표할 글을 정리하다 말고, 자전거를 타고 교토대학으로 갔다. 아주 오래된 대학. 낡은 건물들을 허물고 새롭게 짓는 우리나라 대학들과 사뭇 달랐다. 찾아간 곳은 교토대학 산악부. 동아리 방들이 모여 있는 건물은 벽돌로 지은 것인데 낡을 대로 낡았다. 마치 전쟁이 지나간 듯한 흔적이 넘쳐흘렀다. 아, 이럴 수가. 벽은 곳곳이 뚫려 있었고, 학생들은 점령군처럼 그곳으로 들어가고 나간다. 물어물어 산악부 동아리 방에 들어갔다. 낡은 장비들이 흔연하고, 벽에는 교토대학 산악부 선배들 가운데 등반하다 산에서 죽은 이들의 흑백 사진들을 담은 액자들이 붙어 있었다. 얼추 세어보니 스무 명이 넘었다. K2,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맥킨리, 파타고니아 등과 같은 고산에서 등반하다 숨진 선배들이 후배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아리 방바닥은 나무로 된 마루인데,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낡은 배낭이 지쳐서 누워 있었고, 등반장비들이 떼로 걸려 있었다. 슬쩍 손을 가져다 만져 보았다.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다. 등반을 하는 이들은 나이를 떠나 느끼는 바가 같다. 등반을 돕는 장비 앞에서 숨이 멎는 듯했다. 이곳에서도 오래된 산, 오래된 건물, 오래된 장비, 오래된 사람들이 하나로 묶여 있었다. 아, 이런 것이 생이지. 동아리 방을 지키고 있던 철학과 학생이 내게 문득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 있는 북한산 인수봉에서 등반하고 싶어요라고. 그에게 내 명함을 주고, 등반하러 올 때 같이 만나 하자고 했다. 그는 영어가 서툴렀다. 나는 일어가 부족했다. 그러나 오래된 집과 같은 산은 우리들에게 공용언어였다.

숙소로 되돌아오기 위하여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은각사라는 절이 있는 산 아래 아름다운 마을을 가로질러가는 좁은 길인데, 시인 윤동주가 젊은 시절 이 마을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평온함이 묻어나는 이곳을 나는 자전거를 타다, 걷다 하면서 한없이 느리게 가고 있었다. 길을 걷고, 집에 사는 것이 철학하는 마음이 된다.

이번 주 서울로 돌아왔다. 일주일 동안 떠나 있다 돌아온 서울은 복잡하고, 시끄럽다. 오자마자 펼친 신문에서 집에 관한 기사들이 눈에 띈다. 다들 넓고 큰 집에 대해서만 말을 한다. 집과 삶의 질을 말하기보다, 집의 크기와 값에 대해서만 저울질 한다. 서울에서도 강남에 있는 집의 크기와 값은 놀랍다. 삶이 휘청거릴 만큼 충격을 준다. 그럴수록 소박한 삶의 결은 빛을 잃는다. 만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집에 대한 불경한 태도들이 삶을 온통 휘저어 놓고 있다. 집의 건축적 성취가 삶의 성취와 관계없음에도, 집은 삶과 어긋나면서 같이 간다. 집이 집 같지 않고, 삶이 삶 같지 않다. 집과 삶이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 집은 집이 아닌 헛집이 되고, 삶은 삶이 아닌 헛된 삶이 된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도시에서 개발되는 집들은 집이 아니라 상품일 뿐이다. 집에 대한 태도가 막가는, 아니 막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은 그 끝자리에 겨우 붙어 있다. 서울의 집들을 보면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집에 대한 태도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집을 생각하는 태도가 사뭇 깊어져야 하고, 겸손해야 할 것 같다. 집과 삶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불안한 마음에 건축가인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어의 집은 시이고, 이를 짓는 이는 시인이다. 삶의 집이 있다면 이를 짓는 이가 건축가일 터이다. 건축가는 집을 지어 삶을 거주하도록 하는, 삶을 거느리며 집을 짓는 시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많은 건축가들은 우리들 집과 삶으로부터 조금 혹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너무 바쁘다.

이제 작은 서재에 있는 책상 앞에 홀로 앉는다. 집 속에 내 삶의 속살이 있을까? 삶은 옹색하지 않아야 하지만 집은 옹색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을까. 집이 지닌 심미적 독립성은 오늘날 아파트에 의해서 거의 사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눈을 뜨면 값이 올라가는 아파트에서는 진지한 삶과 진지한 삶을 사는 이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여자 배우들이 등장하는 아파트가 하늘을 가린다. 이제부터라도 오래된 집과 길을 사유하고 싶다. 보다 집다운 집, 보다 삶다운 삶을 담아내는 거주지를 연구하고, 토론하고, 짓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마다하지 않겠다. 땅과 집, 집과 삶이 흩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바를 깊이 생각한다. 삶의 거주지인 집을 온전하게 대하는 서울을 꿈꾼다. 이번 주에는 오래된 도시 전주로 간다.

안치운/호서대학교 연극학과 교수·연극평론가
안치운/호서대학교 연극학과 교수·연극평론가
이번 호부터 연극평론가 안치운 교수가 ‘세설’ 필자로 참여합니다. 안 교수는 연극평론 외에 옛길과 산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분입니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도불, 파리 국립 제 3대학(누벨 소르본)을 졸업한 연극학 박사이며, 저서로는<연극제도와 연극읽기>, <연극, 반연극, 비연극>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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