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44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타 해안에서 찍었다는 흑백사진이다. 독일(?) 군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아시아인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조사를 받는 듯한 모습이다. 사진에 딸린 영문 설명은 이러하다: “이 사람은 일본군으로 징집됐다. 1939년 만주 국경 분쟁시 소련군에 붙잡혀 적군에 편입됐다. 그는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하는 데 강제 투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됐다. 붙잡혔을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이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떤 사이트에는 그가 신의주 출신의 ‘양경종’이라는 인물이며 전쟁이 끝난 뒤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미국으로 이민했고 미국에서 평탄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미국의 역사학자 스티븐 엠브로스의 저서 <1944년 6월 6일 D-DAY>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네 명의 한국 출신 독일 병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지난해 한 방송사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추적해 보았으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소설가 조정래(63)씨가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에 전반부를 발표한 경장편 ‘오, 하느님’은 바로 이 사진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신길만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징집되어 관동군 고바야시 부대의 일원으로서 국경 전투에 투입된다. 그는 다른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소련으로 끌려가며, 그곳에서 소련군에 편입되어 모스크바 사수를 위한 대독 전선에 투입된다. 거기서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 신길만은 노르망디 해안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며, 다시 소련 땅으로 후송되었다가 결국 총살당하고 만다.
‘오, 하느님’은 전체가 원고지 630여 장쯤 되는 소설이며 <문학동네> 겨울호에는 우선 앞부분 절반 정도가 실렸다. 소설은 이 잡지 봄호에 뒷부분이 마저 발표된 다음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겨울호 분재분은 신길만이 소련군에 편입되어 독일군에 맞서 전투를 벌이다가 포로로 잡히는 부분까지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조씨의 대하소설 삼부작 가운데 일제 강점기를 다룬 <아리랑>의 뒷부분과 겹친다. 작가는 “<아리랑>을 쓰기 위한 취재가 이번 소설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오, 하느님’은 적은 분량임에도 스케일은 큰 소설이다. 무대부터가 몽골과 소련, 프랑스 등으로 다국적이다. 대초원의 전투 장면과 다국적 군대의 묘사는 이전의 한국 소설에서 보기 힘들었던 규모를 자랑한다. 자연 묘사 역시 웅장하다. 가령 이러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보라와 땅에서 솟는 눈보라가 뒤엉킬 때면 그 광경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혼몽스러웠다. 그 어지럽고 숨가쁜 뒤엉킴은 마치 소련군과 독일군의 살기가 뒤엉켜 사생결단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하얗게 눈 덮인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려 덮였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눈은 또 붉게 물들었다. 마치 하늘과 인간이 거대한 화폭의 추상화를 그리고 지우는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 조씨는 “소수의 강대국이 다수의 약소국민들을 괴롭힌 것이 지난 역사였다”면서 “그런 부당한 역사가 21세기에도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삼부작 이후 한동안 침묵하던 조씨는 지난 6월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원인을 탐색한 한 권짜리 소설 <인간 연습>을 내놓았다. ‘오, 하느님’을 연재하며 쓴 ‘작가의 말’에서 그는 “언제 어느 때나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다”라고 밝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작가 조씨는 “소수의 강대국이 다수의 약소국민들을 괴롭힌 것이 지난 역사였다”면서 “그런 부당한 역사가 21세기에도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삼부작 이후 한동안 침묵하던 조씨는 지난 6월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원인을 탐색한 한 권짜리 소설 <인간 연습>을 내놓았다. ‘오, 하느님’을 연재하며 쓴 ‘작가의 말’에서 그는 “언제 어느 때나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다”라고 밝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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