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대학 구내에 있는 웨이밍후(未名湖). 미국박사 출신이 많아야만 영어로 논문을 써서 영미의 학술잡지에 발표할 수 있는 교수를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식의 베이징 대학의 개혁은 미국의 변방 속국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간양은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⑮ “대학 교양과정, 개론·통사 위주 탈피해 동서양 핵심적인 고전 읽기로 개편하자” 지식폭증 시대 걸맞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인간’ 양성에 주력 “내가 어렸을 적에 역사학자 샤쩡여우(夏曾佑)를 찾아뵌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분이 ‘자네는 외국어를 잘해 외국 책도 볼 수 있으니 아주 훌륭해. 난 중국 책밖에 볼 수가 없지. 그렇지만 난 중국 책 다 봤어. 더 볼 필요가 없어’라고 하더라고. 당시에 난 깜짝 놀랐지. 아 이 분이 이제 노망이 드셨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내가 지금 그 분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분 말씀에 일리가 있더라고. 중국의 옛 책(古書)은 수십 종에 불과해. 그러니 깡그리 다 읽을 수가 있어.” 중국의 고전 수십종에 불과! 중국의 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 1890-1969)의 생전 회고담이다. 샤쩡여우나 천인커는 모두 우리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둘 다 저명한 역사학자들이다. 특히 천인커는 중국 최고의 이른바 국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난 1990년대에는 한동안 이 분에 관한 붐이 일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십여년 전에 이 이야기를 읽고 난 잠시 흥분한 적이 있었다. 중국 책은 그야말로 바다처럼 많은데 어떻게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일까. 도대체 수십 종에 불과한 핵심적인 중국 책은 어떤 책일까. 중국을 알 수 있는 ‘규화보전’은?
근자에 전개되는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계기가 되어 중국 대학의 인문교육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문득 예전에 읽었던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중국 대학의 인문교육이란 주로는 학부생 단계에서 시행되는 교양교육을 지칭하는 것인데 최근에 이 문제가 부상하여 논의가 분분하다. 이 문제를 두고 작년에 열린 한 회의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개론이나 통사 위주의 교양교육에서 탈피하여 동서양의 핵심적인 고전을 읽는 것을 위주로 교양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국은 일찍이 1952년에 소련의 대학편제를 따라 대학교 1학년 때 전공을 나누어 교양과 전공의 구분이 마땅히 없었다가 1995년부터 교양교육 제도를 도입하여 시험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문화소질(文化素質)교육 혹은 통식교육(通識敎育)이라는 말을 쓰는데 1999년 이후 32개의 시범 대학에서 최소한 10학점 이상의 과정(通選課)을 이수하도록 시범 실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이징대학(16학점)과 칭화대학(13학점)도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한편 작년부터 상해의 명문 푸단대학에서는 아예 학부의 관리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대학처럼 전공을 불문하고 모두 일단 ‘푸단학원’(우리의 학부대학과 같다)에 들어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기초적 지식을 쌓게 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에서의 교양교육은 우리의 사정과 비슷하게 기존 전공 위주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학생들의 흥미와 지식을 넓혀 주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그저 이런 저런 과목을 많이 개설하면 좋은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중국 문화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른바 신좌파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간양(甘陽)은 이런 현상을 비판하면서 양보다는 핵심적 질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인문교육 문제가 주목을 끌고 있다. 그가 교양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요즘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대폭발하는 시대야말로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고 어떤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두드러지는데 교양교육의 근본은 바로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사고능력(윤리문제, 인생문제에 대한 입장 등을 포괄하는)을 배양해낼 수 있는 기초를 닦는데 있다. 따라서 교양교육은 마땅히 주로 인문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책은 대충 읽어서는 안 되고 또 나중에 마땅히 읽을 기회도 없기 때문에 대학 1~2학년 때 집중적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학년이 되면 취업이다 뭐다 하여 편안히 이런 기초적인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중국의 주요 대학에서 배정한 교양과목의 학점이 앞서 밝힌 것처럼 제한적이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공통핵심과정(the common core course)’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격하게 설계되고 학생들에게 엄격하게 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시카고대학에 유학하기도 했던 그는 이런 중국 대학의 교양교육의 모델이 기본적으로 미국 대학의 교양교육 제도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제도는 학생들에 대해 높은 책임을 질뿐만이 아니라 엘리트를 배양한다는 교육목표를 매우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인문계와 이공계의 학생에게 서로 다른 교양 수준을 요구를 하는 프린스턴 대학의 모델이 중국대학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프린스턴 대학은 이공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인문사회과학의 교양 수준이 인문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자연과학의 수준보다 높다. 사실 근자에 중국 각 대학의 교양 과정의 설계는 대체적으로 미국 대학의 교양교육 제도를 모방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교양과목을 대략 다섯이나 여섯 개의 큰 영역으로 나누고 매 영역마다 적어도 하나씩은 반드시 선택하도록 하는 것 등은 미국과 유사하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아주 다르다. 미국의 경우 대학 1, 2학년은 기본적으로 ‘핵심교양’을 이수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과목을 이수하는데 필요한 요구 조건이 매우 엄격한 점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미국의 대학생은 일주일에 500~800 페이지 정도의 책을 읽어야 함에 비해 중국의 경우는 100 페이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교양과목은 전체 이수학점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지만 미국은 아무리 못해도 5분의 1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양·전공 딱히 구분없는 소련 학계 모델 버리고 프린스턴 대학을 새 모델로 “서양을 알아야 중국 속으로 들어간다”는 주장
지난해에 전문적으로 교양교육(통식교육)을 위해 대학 안에 푸단(복단)학원(우리의 학부대학)을 설치한 상해의 명문 푸단대학.
그는 또한 인문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법학과 경영학 과정을 미국과 같이 대학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는 우리와 같이 이들 학과를 학부에 두고 있는데, 경제가 발전하면서 학부에 이들 학과를 설치하는 대학이 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미국처럼 하면 학부에서 교양교육을 제대로 받은 우수하고도 건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만이 이들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 두 과정을 대학원에 두는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그것이 바로 이 두 과정이 시장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 두 곳을 졸업한 학생은 돈을 잘 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 돈을 잘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씀. 만약 미국에서 이 두 학과가 학부에 설치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근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전체 교양교육 제도는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간양이 이처럼 중국 대학의 교양교육의 모델을 미국의 대학에서 찾고 있다고 해서 그를 우리 주변에서 늘상 접하는 맹목적 미국 ‘추종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하면 커다란 오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의 문화에 대해 주체적 자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훗날 미국의 교양교육의 기본적 모델이 된 20세기 초의 콜롬비아 대학의 교양교육제도는 전통적 고전교육 중심의 시스템이 붕괴된 이후에 현대적인 방식으로 과거의 고전교육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이다. 전통적 유대가 단절되자 새로운 방식으로 동일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드는 교육이 바로 미국의 교양교육이었는데 콜롬비아대학(1917-1919)에서부터 시카고ㆍ 하버드대학(1945) 그리고 스탠포드대학(1987) 방식으로 몇 번의 변화가 있었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서양문명 속에서 놓인 위치를 인식하고, 그것과 자신의 역사문명의 관계를 자각케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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