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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뉴욕발 ‘프리랜서 노동조합’이 뜬다

등록 2007-02-01 19:01수정 2007-02-01 20:13

프리랜서 노동조합 설립자인 호로위츠가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사무실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뉴욕타임즈
프리랜서 노동조합 설립자인 호로위츠가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사무실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뉴욕타임즈
일자리 정보 네트워크로 회원들 붙잡아
보험회사와 일괄협상 싼값에 계약 맺고
실업급여 받도록 로비해 가며 입법운동
실용적 접근방식 비정규직 만족도 높아
안과 밖 /

늦은 오후 또는 어중간한 주말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제일 좋은 장소가 어디인가? 딱히 오라는 데도, 별다른 사교성도, 창의적인 여가정신도, 주머니 사정도 만만찮은 사람에게 파라다이스가 존재하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곳은 헌책방이다. 나는 틈만 나면 헌책방을 찾는다. 그런 점에서 매주 한겨레 <18.0>의 지면을 빛낸 임모 기자와 비슷하다.

천만다행으로 내가 사는 데서 가까운 거리에 고서점이 수두룩하게 깔려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군데는 규모도 크고 책도 많고 아주 조용한데다 주인이 고객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 내겐 천당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 안에서도 세일코너를 또 따로 마련해 놓고 자선사업 수준으로 책을 처분하고 있으니 옛날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환상적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만 해도 프레데릭 넬슨이라는 사람이 1945년에 쓴 <코리아 그리고 동아시아의 구 질서>라는 책을 단돈 3달러에 입수하고 하루 종일 흐뭇한 기분으로 지낸 적도 있다. 그런데 헌책방에 출입하다보니 그 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상착의에는 어떤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우선 얼굴에 독기가 하나도 없다. 이 험한 세상을 저런 표정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점퍼와 청바지에 운동화, 아니면 낡은 점퍼와 낡은 청바지에 낡은 운동화 차림이다. 그에 덧붙여 안경에 수염까지 달고 있으면 어떤 인물들인지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철학, 역사, 문학 책에서부터 요리, 육아 분야 책까지 이들이 안 보는 코너가 없다. 나는 혼자서 이들을 ‘헌책방주의자’라고 명명하고 대체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저런 이들은 글 쓰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고 내게 일러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영락없는 문인, 작가, 소설가, 시인, 문필가, 번역가의 느낌이 왔다. 다시 말해 자유인, 자유기고가, 즉 프리랜서들이었다.

비정규직 사회안전망 시급

그런데 자유시장의 나라 미국에서 ‘자유인’들은 사상과 활동의 자유뿐만 아니라 굶거나 아플 자유까지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우리와 같은 전국건강보험이 없다. 노년층,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호제도가 있긴 하나 대다수 의료보험은 상근직 근로자에게만 해당된다. 일정한 직업이 없으면 의료보험도 없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수천만 명이나 된다.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아프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냥 사는 것이다. 이렇게 풍요로운 나라에서 건강보험과 같은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따라서 공공 건강보험 문제는 미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어 있다.

내가 사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미국 최초로 전주민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한 후 ‘터미네이터’ 정치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를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주민 건강보험을 도입하겠다고 해서 매일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50개나 되는 주들이 모여 있는 나라, 게다가 지방자치 전통이 강한 나라이니 단일한 전국적 제도를 실시하는 게 그다지도 힘든 모양이다. 한국과 같은 사이즈가 오히려 이런 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런 실정이니 비정규직, 반상근직, 계약직 노동자들의 각종 사회보장 문제, 특히 건강보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노동현안이 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이런 노동력을 ‘비전통적' 노동자라고 부른다. 1960년만 해도 민간부문의 정규 노동자들 중 약 3분의 1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지만 현재 민간부문의 노조가입율은 7.4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전통적 노동자들은 적게 잡아도 2천만 명이 넘는다. 이런 대인구가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조직하고 여러 애로사항 특히 건강보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노동현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조직이 뉴욕을 중심으로 커 나가고 있다. 이름 하여 ‘프리랜서 노동조합’. 아주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 조직이다. 프리랜서의 개념도 아주 넓게 잡았다. 내가 자주 마주치는 헌책방의 단골손님들과 같은 진짜 프리랜서 문필가로부터 미디어, 인터넷, 사진, 컴퓨터 그래픽, 웹디자이너, 비디오 에디터, 무용수, 출판계 교정인력, 사진저널리즘, 잡지 자유기고가 등등 모든 비전통적 노동자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 뉴욕시 인근에서만 자발적으로 4만 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고 한다. 조합원의 다양한 구성 때문에 사업주와 단체교섭을 하기는 어렵다. 대신 건강보험, 장애급여, 퇴직급여, 산업재해, 생명보험 등에 일단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원래 노동문제 변호사로 시작해 이 단체를 1995년에 창설하고 2003년에 확대개편했던 사라 호로비츠씨는 이 노동조합을 미국의 모든 프리랜서들을 아우르는 전국적인 비정규직 노동조합으로 키울 작정이라고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누구에게나 문호가 개방되어 있고 노동조합 입회비나 정기회비는 없다. 자기가 가입한 보험료만 내면 된다. 조합은 회원의 숫자를 이용해서 보험회사와 일괄협상을 하여 대폭 할인된 보험요율로 보험계약을 맺고 그 중 정해진 비율 일부를 노동조합 회비로 적립한다. 일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제조합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실용주의적 접근은 정말 미국적인 발상인데 조합원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라고 한다. 노동전문가들도 프리랜서 노동조합이 기존의 노동운동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비정규직 문제에 하나의 돌파구를 열고 있는 운동 형태라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회비 없고 가입한 보험료만 내

물론 기존의 노동운동과 유사한 기능도 하고 있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연구하고 이들의 이익을 대변할 입법운동을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장 급한 것은 프리랜서들의 일감이 끊겼을 때를 대비하는 문제다. 현행법상 프리랜서는 같은 고용주와 2년 이상 일했다 하더라도 ‘감원’ 대상이 될 경우 실업급여 혜택을 받지 못한다. 독자적인 계약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전체 노동인력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인데도 법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업급여 문제해결은 프리랜서 노동조합의 핵심적인 사업과제로 떠올라 있다. 그 외에 올해의 핵심사업을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과세 형평성 문제, 노후대비 투자계획, 비정규직 표준 고용규정, 비정규직 공정 급여보장 등이 올라와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뭉쳐야 산다’는 진리를 익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직 역사가 짧다 보니 조합원들이 조합에 거는 기대도 제각각이다. 단순히 공제조합으로 기능해 주기를 원하는 회원도 있고 임금협상, 노동시간 단축 등 일반 노동조합과 똑 같은 활동을 바라는 회원도 있다. 조합은 현재 프리랜서들의 구직, 구인을 연결시켜 주는 네트워크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특성상 아주 다양한 서비스로 회원들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조합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최근의 게시판을 훑어보았다. (www.FreelancersUnion.org). “프리랜서 직물공예 디자이너 급구. 경력자 우대. 특히 여학생용 스웨터 디자인 능력 선호. 대우 협상가능.” 이러한 현장의 네트워킹으로부터 뉴욕주 상원의원인 힐러리 클린턴에게 로비하는 것까지, 손 안대는 사업이 없는 신세대형 노동운동이 바로 프리랜서 노동조합인 것이다. 최근 프리랜서 노동조합을 기사로 다뤘던 <뉴욕타임스>는 프리랜서들을 한데 모으기가 고양이들을 한데 모으는 것보다 더 어려운데 이 조합이 그것을 해냈다고 했다. 이 기사에서 호로비츠씨는 노동운동이 정체된 운동이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길드에서 장인조합, 그리고 산업형 노동조합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니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기염을 토한다.

조효제 /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 /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노조운동의 끝없는 진화

나는 노동운동에는 문외한이지만 프리랜서 문필가의 생활을 가까이서 접해본 사람이다. 비정규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일단 가능한 채널로 조직하고 이들에게 단일한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주말에 고서점에 나갔다가 눈에 익은 헌책방주의자 동지를 만나게 되면 꼭 한번 물어볼 생각이다. ‘선생께서도 혹시 노동조합원이신가요?’

조효제 /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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