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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병주 노예사상’ 현장을 찾아보니

등록 2009-03-05 18:41수정 2011-12-13 16:36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사자는 사자 시대의 향수를 지니고 있고 독사도 그러하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뭐냐. 용병을 자원한 사나이, 제 값도 모르고 스스로를 팔아 버린 노예가 아니었더냐. 조선인 학병 4500여 명이 일시에 입대한 것은 1944년 1월20일. 요행히 살아 돌아와 훗날 <지리산>을 쓴 작가 이병주는 노예의 사상을 보듬어 안고 나머지 생을 글쓰기에 바쳤소. 대체 노예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는 천당이라 불리는 고도 쑤저우 소재 일본군 60사단 치중대(수송부대) 소속으로 말[馬] 시중을 들며 또 보초를 서며 수첩에다 이렇게 적었다 하오.

“먼 훗날/ 살아서 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더라도/ 사람으로 행세할 생각은 말라/ 돼지를 배워 살을 찌우고/ 개를 배워 개처럼 짖어라”(<8월의 사상>)라고. 귀국한 그는 10년 동안 교원 노릇을 했으나 도무지 학생 앞에서 위신을 세울 수 없었소. 어찌 해야 노예의 사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생각 끝에 언론계에 뛰어들었소. 대설, 중설 등 닥치는 대로 무려 2천여 편을 썼소. 그중 두 편이 군사정권에 걸려 10년 징역. 실형은 2년 7개월. 출옥한 그의 데뷔작이 <소설·알렉산드리아>(1965)이오.

그는 옥중에서 구상한 환상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앞에다 깃발처럼 ‘소설’을 내세웠소. 이것은 절대로 ‘소설’이지 대설도 중설도 아니라는 것. 감옥 속 영하 20도는 영하 25도, 30도보다 얼마나 견딜 만한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그는 ‘황제’라 불렀소. 노예의 사상이 제왕학으로 초극되는 장면이 아니었던가. <관부연락선>을, <지리산>을, 또 <산하>를 두고 제왕학의 펼침이라 했지만, 그는 이로써 과연 노예사상을 깡그리 초극했을까. 이런 의문을 물리치기 어려운 것은 어째서일까.

미완성 최후작인 대장편 <별이 차가운 밤이면>(1992)에서 그는 노예사상을 다시 문제 삼았소. 노비의 자식인 학병 박달세의 운명을 다루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는 끝내 노예사상에서 몸부림쳤다고 할 수 없을까. 대체 사상이 뭐길래 이토록 한 인간을 괴롭혔을까. 이 물음이 문득 우리들(단장 김종회)로 하여금 이 한겨울 쑤저우 땅을 다시 밟게 만들었소. 호구산이나 고소성 따위란 안중에도 없었소. 노예사상의 체험 현장이어야 했소. 그의 목숨을 구해준 중국인 소년에게 권총을 건넨 그 운하여야 했소. 그래야만 미완의 <별이 차가운 밤이면>을 내 나름으로 완성시킬 수 있을 듯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또 상하이로 발길을 옮겨야 했소. 쑤저우 2년에 상하이 6개월의 노예였으니까.


노예 이병주는 귀국(1946년 2월)까지 이곳 포로수용소에 머물렀소. 수첩에 또 다른 노예 체험을 뭐라 적었을까. 나는 이 두 가지 노예 체험을 중국 문인에게도 귀띔해 주고 싶었소. 다행히도 상하이 작가협회 회장(왕안이)을 비롯해 문예지 <수확> 주간 쌰오옌민, 연락관 첸젠디, <상하이 문학> 주간 자오리훙 제씨와 저녁 식탁을 마주할 수 있었소.

 그들의 반응은 다음 두 가지. 중국 소년은 그 후 어떻게 됐느냐가 그 하나. 이병주 작품 중국역이 있느냐가 그 다른 하나. 귀국 중 내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소. 이제 유작 <별이 차가운 밤이면>을 나름대로 완성시킬 수 있을 듯한 느낌이 그것이오.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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