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기억의 찌꺼기들, 예컨대 ‘오전 5시30분, 우리는 이국의 열매를 팔기 위해 선체를 따라서 작은 선대를 이루며 몰려드는 상인들을 보면서 레시프항에 정박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보잘것없는 추억들을 적어 놓기 위해서 펜을 들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55년에 이렇게 썼다. 20세기의 걸작으로 꼽히는 <슬픈 열대>의 앞머리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27살 때부터 몇 차례에 걸쳐 남미의 ‘오래 된 미래’로 들어가 서구 문명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하였는데 그때의 기억을 무려 20여년이 넘도록 연구하고 다듬어서 <슬픈 열대>를 썼다. 이 명저는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한 탐험가들도 싫어한다”로 시작하는데, 레비스트로스가 이렇게 불만에 찬 심경을 첫 문장으로 삼은 까닭은, 아마도 그 무렵 서구인의 여행이나 탐험이 자신들의 시선으로 유럽 이외의 다른 문명을 함부로 재단해 버리는 풍습이 있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게 아닌가 싶다. 그 때문에 레비스트로스는, 앞에 인용한 바와 같이, 서구인의 여행이나 탐험을 ‘보잘것없는 추억’이며 ‘기억의 찌꺼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찌꺼기를 다룬 책들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세태를 응시한다. 내친김에 그의 말을 한번 더 인용한다. “여행기, 탐험 보고서, 또는 사진첩의 형태로 된 아마존, 티베트, 아프리카 이야기들이 서점을 뒤덮고 있는데, 이 책들이 주로 인기만을 염두해 둔 채 쓰이고 또 편집되었기 때문에 독자는 그 속에 담긴 증언의 가치를 식별할 길이 없는 것이다.” 1955년의 진술을 오늘의 우리 풍습에 겹쳐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출판 관계자들에 따르면 여행이나 건강은 요 근래의 이른바 ‘트렌드’가 되고 있는데 사회적인 불안이나 경제 위기에 대한 심리적 위축이 낯선 곳에 대한 동경과 자기 몸에 대한 염려로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내 큰 서점에 나가보면, 과연 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여행기, 보고서, 사진첩의 형태로 된 여러 대륙의 책들이 출간되어 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곰 발바닥을 먹기 위해 나서던 1990년 초의 유행에 비한다면 요즘의 여행이란 상당히 세련되었고 전문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공정 여행’을 실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기록들 가운데 대부분이 ‘기억의 찌꺼기’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낱 개인의 두서없는 구경과 유람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가난한 나라의 골목이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식의 진부한 문장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책들도 없지 않다. 이런 기이한 풍조는 나라 안의 여행에도 관철된다. 부산이나 마산 같은 곳의 달동네, 그곳의 골목이며 담벼락을 뜻있는 공공미술가들이 검소하면서도 깨끗하게 단장을 한 것까지는 좋은데, 다들 그곳으로 찾아가 셔터를 눌러대는 것이다. 낡은 의자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어느새 ‘그림 좋은’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사진작가 필립 퍼키스는 ‘거리의 사진’으로 유명하다. 2006년에 뇌일혈로 왼쪽 눈을 실명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에 내한하기도 한 필립 퍼키스의 예술 세계는, 두 권의 얇지만 두꺼운 책, <사진강의노트>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 농축되어 있다. 필립 퍼키스는 단지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하며 바로 그 순간, 곧 불현듯 무언가 다가오는 순간 셔터를 누른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마법과도 같은 변화, 곧 ‘초월적인 변화’를 담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거장의 훈수를 우리가 일상에서 곧바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의 윤리적 자세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함부로 렌즈를 들이대는 일만은 조심할 수 있는 것이다. 실은 바로 그 때문에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를 권하는 중이다. 그는 오늘날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예민한 존재’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문화 교육이나 정책이나 진흥의 방침이 대체로 ‘생산자와 아이디어맨’을 촉발하는 방향이라고 진단한다. 인터넷과 디지털의 시대, 게다가 이 두 가지가 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요즘 시대에 우리 청소년들 또한 디카를 농구공이나 볼펜 다루듯이 능숙하게 다루고 있다. 학교 안팎에서는 디카를 매체로 삼아 다양한 교육이나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카메라를 들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보는 일은 흥미롭고 유익한 일이다. 다만 ‘기억의 찌꺼기’를 수집하고 그것을 늘어놓기 위해 세상을 향하여 아무렇게 셔터를 눌러대는 일은 경계할 일이다. “충만한 감성으로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사색에 잠기는 것”, 필립 퍼키스가 이 첨단의 디카 시대에 던지는 값진 충고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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