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희 영화감독
[문화‘랑’]조원희의 영화 그리고 농담
평소 <한국방송>의 <개그콘서트>를 즐겨 본다. 그중에서도 잡혀온 용의자가 알고 보니 구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는 바람에 취조하던 형사가 어이없이 눈물을 흘린다는 콘셉트의 ‘나쁜 사람’ 코너를 참 좋아한다. 그런데 지난주 28일 방송을 보다 버럭 화가 났다. 차에 뛰어든 자해공갈단 용의자가 알고 보니 영화 촬영 중이던 스턴트맨이었다. 거기까진 괜찮다. 그런데 그 스턴트맨을 15년차가 됐는데도 아직 대사 한마디 없는 대역이라고 불쌍해하는 것, 본인은 “감독이 불쌍히 여겨 대사를 세 마디나 줬다”고 기뻐하는 것 등이 매우 거슬렸다. 스턴트맨이 배우가 되면 ‘승진’하는 게 아니다. 이직이다. 스턴트맨은 배우들의 위험한 장면을 대신해주는 전문직이다. ‘대사를 얻지 못해 몸을 쓰는 직업’이 아니란 말이다. 지난번엔 성우를 비하해서 코미디언협회장이 사과를 하는 일이 생기더니 이번엔 스턴트맨이란 말인가. 해당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었지만 이내 한국 특유의 ‘승진 중심 문화’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회사는 인턴으로 출발해 사원, 대리, 과장, 부장, 이사, 사장으로 승진하는 ‘테크 트리’를 지니고 있다. 일정 시간 안에 다음 단계로 승진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시스템이다. 사실 우리 영화계는 오랫동안 도제 제도와 승진 제도를 혼합한 ‘테크 트리’로 운영됐던 게 사실이다. 연출부 막내로부터 시작해 연출부 서열이 높아지면서 조감독을 거쳐 감독이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조감독은 사실 감독 수업을 하며 감독을 도와주는 자리 정도가 아니다. 촬영 순서 정리와 배우들의 등퇴장 관리 등은 오래 하면 노하우가 쌓이는 전문적인 분야다. 그래서 할리우드에선 오래전부터 전문 조감독 시스템이 마련됐다. 초보 감독이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쯤 되는 조감독의 보필 아래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촬영부도 마찬가지다. 촬영부의 첫번째 조수는 보통 ‘포커스 풀러’라는 보직이다. 이것은 촬영중 촬영기가 움직이거나 피사체가 움직일 경우, 초점을 유지하기 위해 렌즈의 포커스 링을 움직여주는 역할이다. 엄청난 순발력과 거리 감각이 필요하다. 배우가 피를 토하는 열연을 했는데 초점이 맞지 않아 쓸 수 없는 장면이 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조수’다. 당연히 이 자리는 오래 하면 할수록 숙련된 기술이 쌓인다. 최근 우리 영화계에서도 ‘포커스 풀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문인을 양성하고 있으며 전문 조감독도 존재하지만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할리우드에는 40년 된 ‘조수’가 있다. 그런 사람이 잡는 초점은 완벽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보통 촬영 감독이 되기 위해 2~3년 정도 거치는 보직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방송의 비극이기도 하다. <개그콘서트>에서는 몰이해 때문에 스턴트맨을 비하하게 되고, <생활의 달인>에서 ‘포커스의 달인’을 찾을 수가 없다.
조원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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