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미국서 열린 음악ㆍ영화ㆍ인터랙티브 축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에서 3D 공연을 선보인 일본 일렉트로 댄스 그룹 ‘퍼퓸’. http://www.perfume-web.jp/
“왜 3D가 더 나으냐구요? 음,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종족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3D로 보죠. 그것이 우리가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입니다. 왜 우리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3D 속으로 들어가지 않죠? 단언컨대, 3D는 눈속임이 아니라 현실과 동기화하는 것입니다. 3D냐 아니냐 여부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우리가 실제적으로 세상을 느끼고 지각하는 길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척도인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흥행한 3D 영화 ‘아바타’와 ‘타이타닉’을 만든 영화감독 제임스 카메론은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 방송 인터뷰 중에서 위와 같은 ‘3D 철학’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올해 ‘라이브 음악의 세계적 수도’ 미국 오스틴시에서 열린 음악ㆍ영화ㆍ인터랙티브 축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에서는, 일본의 여성 3인조 일렉트로 댄스 그룹 퍼퓸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3D 엔터테인먼트 철학’을 제대로 구현한 것 같습니다.
일본 그룹 퍼퓸의 3D 공연에서 자신들의 노래 ‘스토리’를 부르는 장면. 동영상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6IzbeOt-XUY
퍼퓸은 이번 SXSW 무대에서 ‘스토리’라는 노래 공연을 3D 퍼포먼스로 꾸몄습니다. 둔중하게 고막을 때리는 신디 베이스 비트의 강약에 따라 청각신경들이 새떼처럼 왼쪽 오른쪽 뇌 반구를 오가듯 활성화되면, 한편으론 오오모토 아야노, 카시노 유카, 니시와키 아야카 퍼퓸 멤버 3명의 3D 모습들이 축소, 확대, 구상과 비구상의 혼합을 이루며 팽팽하게 긴장된 시신경 줄 위에서 화려한 이미지 곡예를 펼칩니다. 파도처럼 ‘철썩철썩’ 온몸을 때리는 변화무쌍한 주파수의 전자음들로 촉각까지 취하게 만들며 화려한 ‘감각의 제국’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죠.
물론 한국형 힙합을 선보인 에픽하이, 복고풍 여성 보컬 그룹 바버렛츠, 퓨전 국악밴드 숨, 행위예술과 일렉트로닉을 결합한 듀오 EE 등 우리나라 뮤지션들도 자신들의 음악에 맞는 훌륭한 무대를 펼쳐 축제 열기를 뜨겁게 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퍼퓸의 경우 일렉트로 댄스라는 음악 장르에 걸맞게 최첨단 기술인 3D 퍼포먼스를 선보여 더 눈길을 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멀리 있는 너에게 보내고 싶어
그래, 이건 틀림없는 하나의 이야기
내 기도와도 같은
이리 와, 별빛 켜진 하늘을 보며 가슴을 열어
기도하듯 노래하자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
-퍼퓸 ‘스토리’ 중에서
어떻게 보면 반세기 전 저 멀리서 백남준이 보내온 이야기들을 퍼퓸이 현재의 이름으로 새롭게 각색해 펼쳐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예술에 담아내려는 본질적 시도가 닮아있다는 판단이 드는 것이죠.
백남준이 1988년 경주 문화엑스포 행사를 맞아 제작한 . 한겨레 자료사진
1960년대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비디오와 TV를 능동적인 예술 표현방식으로 활용해 인간의 내면과 외연을 확장시켜 서로 소통케 하려는 ‘미디어 아트 사상가’ 백남준의 별빛 같은 메시지가 문득문득 느껴지는 것입니다. 미술, 행위예술은 물론 작곡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철학적으로 융합하여 첨단 기술 양식의 예술로 펼쳐낸 그의 발자취가 현대의 대중음악계로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요?
1920년대 바우하우스가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회화, 조각을 넘어 건축 등 실생활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해 현대 산업디자인에 아직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최초로 금속을 사용해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만든 바우하우스의 의자(1925년). 한겨레 자료사진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19세기 후반 세계미술 사조의 본류로서 문학과 음악에도 큰 영향을 줬던 인상주의만 하더라도, 사물의 형태를 전달하는 것은 빛이며 그 빛의 강약에 따라 세상의 형태가 변하고 그 빛은 프리즘을 통과할 때 7가지 색깔로 나뉜다는 등의 근대과학 광학 지식을 예술에 반영한 것이죠.
아예 3만5천년 전으로 되돌아가 호모 사피엔스가 만든 피리를 살펴보면 과학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것임을 근본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일 남부 홀레 펠스 동굴에서 발견된 길이 22cm 지름 2.2cm의 독수리 뼈에 구멍을 4개 뚫어 만든 이 피리에는 선사시대 인류들이 오랜 시간 공기와 소리의 관계를 관찰하고 구멍을 뚫어보는 등의 실험을 통해 얻어낸 당대 최고의 과학지식이 녹아있는 것이니까요.
권병준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 공연. https://www.youtube.com/watch?v=hWcjGX-qKfE
1990년대 기타리스트 박현준과 록밴드 삐삐롱스타킹 활동을 하고 2000년대 음악감독 달파란과 일렉트로닉 계열의 음악을 함께한 바 있는 ‘사운드 아티스트’ 권병준 또한 과학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하는 호모 사피엔스 중의 한 명입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왕립음악원 예술과학 과정을 밟아 전자음악과 미디디어 아트를 공부한 그는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 공연에서 소리의 파장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는 레이저빔 등을 설치해 소리, 빛 등 다양한 감각이 복합된 무대를 선보이고 있죠.
내년 SXSW에는 권병준과 같은 예술과학자들과 우리나라 대중음악 그룹들이 합동 작업을 통해 싸이의 세계적 충격파를 이을 뭔가 더 새롭고 획기적인 케이팝 무대를 선보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쪽 눈으로는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예술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인간에게 새로운 물질을 선사하는 테크놀로지를 보는 것이 외눈박이 거인족 ‘키클롭스’를 넘어 인류가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김형찬기자 chan@hani.co.kr
김형찬의 앱으로 여는 음악세상 http://plug.hani.co.kr/appsong/2154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