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오염의 대명사였던 안양천의 2007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처음이자 마지막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으로 1990년대 초반 시대적 감수성을 대변했던 기형도의 시들에는 유난히 식물과 관련된 묘사들이 많습니다.
사람의 걸음 소리를 시든 배추 이파리 소리로 의인화(擬人化), 아니 의물화(擬物化) 시켜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묘사한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엄마 걱정’ 중에서)와 같은 문장.
또 산업화 시대 고향을 떠나와 도시 외곽을 맴돌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뿌리 상실에 대한 아픔과 정서적 근원에 대한 갈망을 그린 “아버지는 흙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위험한 가계(家系) 1969’ 중에서)와 같은 싯구들이 바로 그것이죠.
더 나아가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 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식목제 (植木祭)’ 중에서)와 같은 구절들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나무나 풀꽃들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1960~70년대 당시 서울 변두리 지역이었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기형도의 시 언어들은 어린 그의 삶 곁을 따라 흐르던 안양천 주변 온갖 식물들의 ‘사계’로 때론 아름답게 때론 슬프게 물들어 있는 것이죠.
광기어린 속도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안양천변 공장들이 쏟아내는 폐수로 썩어가던 강물이 한숨처럼 토해낸 안개를 모티브로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인 ‘안개’가 태어났듯, 형형색색의 식물들은 그의 인생의 중요한 시간과 공간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꽃을 기억 속 한가득 피워 올렸던 것입니다.
안양천변에 살던 기형도가 거기서 함께 살던 식물들의 ‘사계’를 들었듯, 그의 기억 속의 식물들 또한 기형도의 시와 노래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 추정은 단지 시적 상상력에 의한 주장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요.
식물이 청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실제 실험에서도 밝혀진 바 있습니다. 호주 웨스턴대학의 식물생리학자 모니카 개글리아노 교수팀은 수경재배하는 옥수수에 한쪽 방향으로만 220Hz의 소리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옥수수의 뿌리가 소리 나는 방향으로 굽어 자라는 현상을 확인한 것이죠. 게다가 그 옥수수 뿌리들은 자기들이 들은 220Hz의 소리와 비슷한 선율의 소리를 발산했다고 합니다.
개글리아노 연구팀의 또 다른 연구진은 고추 씨앗들이 페늘(회향 茴香, 달콤한 향이 극도로 강한 채소) 옆에서 더 빠르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이 실험에서 연구진들은 페늘을 향기는 차단하지만 소리는 전달시키는 상자 안에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고추 씨앗들이 페늘이 내는 소리를 들을 때 더 빨리 성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죠.
기형도는 누이와 매형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이면 그들과 함께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합니다. 중앙고등학교에 다니던 고교생 시절에는 교내 중창단 ‘목동’에서 바리톤으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애니 로리’ ‘코튼 필즈’와 같은 노래들을 즐겨 불렀다고 하죠.
최근 영국 런던에 위치한 퀸메리 대학의 연구진은 음악이나 목소리 등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이용해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는 나노발전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데요. 이 나노발전기는 나노 막대기의 형태로 된 물질이 소리의 진동에 반응하는 움직임을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라고 하니, 이렇게 분명한 물리적 실체로서의 소리가 어떤 식으로든 식물이 가진 나노 단위의 미세한 조직에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노래 소리를 들은 식물들은 어떤 모양의 이파리와 꽃들을 피워 올리며, 기형도의 시 속에 울창하게 우거진 기억으로 남았을까요?
기형도 시인이 고교생 시절 중창단에서 즐겨 불렀던 CCR의 ‘코튼 필즈’. 동영상 출처 (http://www.youtube.com/watch?v=C4zPEmRufMU&list=RDC4zPEmRufMU )
‘코튼 필즈’를 부른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은 1968~1972년 미국에서 록앤롤 컨트리 록 장르의 음악활동을 했던 남성 4인조 밴드로 전쟁 반대 등 정치적 메시지를 노래에 담으면서도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로 국내에서도 여러 곡들이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고고장 댄스곡 레퍼토리로도 빅히트를 쳤습니다.
기형도 시인이 고교생 시절 중창단에서 즐겨불렀던 ‘애니 로리’ 디나 더빈이 부른 버전. 동영상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fhe2TQOy-g )
‘애니 로리’는 1682년 무렵 쓰여진 윌리엄 더글라스의 시에 1834년 앨리샤 스콧이 멜로디를 붙여 만든 오래된 스코틀랜드 노래입니다. 더글라스는 애니 로리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정치적 입장 차이가 너무나 컸던 애니 로리 부친의 반대로 결국 이별하게 됐고 그 상실감을 시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나중에 미국으로 퍼져 남북전쟁 당시 군인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졌다고 합니다.
▶김형찬의 앱으로 여는 음악세상 http://plug.hani.co.kr/appsong/1911704 김형찬기자 c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