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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우연인 듯 우연 아닌 필연의 음악

등록 2015-05-22 15:33수정 2015-05-22 15:36

존 케이지 선불교 접목해 실험…백남준도 영향
슈톡하우젠 다양한 도전…비틀즈도 기법 응용

전남 구례 화엄사 사천왕상. 한겨레 자료사진
전남 구례 화엄사 사천왕상. 한겨레 자료사진

“연기(緣起)를 보는 사람은 법(法, 다르마 dharma 규범, 속성)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부처님의 인연담과 여러 불제자들의 수행담을 담은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석가모니는 위와 같이 말합니다. 여기서 연기란 모든 사물과 현상이 직접 원인인 인(因)과 간접원인인 연(緣)에 따라 생기며, 항상 서로 관계되어 이뤄지기 때문에 불변적이고 고정적인 실체란 없다는 가르침이죠.

다가오는 5월25일 불기 2559년 석가탄신일을 맞아 절이 있는 산 입구 근처에는 연등들이 길게 줄이어 걸려있습니다. 불자든 불자가 아니든 인연처럼 걸려있는 그 연등 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절문 앞에 서있는 사천왕, 그 중에서도 비파를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아마도 저처럼 음악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빠짐없이 다 듣는다고 하는 이 다문천왕의 손에 비파가 들려있는 이유는 불교가 전래되어 온 고대 서역에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악기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만약 시타르 같은 악기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나라 절들 앞에 서있는 다문천왕의 손에는 비파 대신 시타르가 들려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역사의 ‘우연’에 의해 지금 다문천왕은 절 앞에서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우연’은 음악에서 몇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어느 순간 영감을 받아 불쑥 튀어나오는 멜로디 자체가 우연의 산물인 것이죠. 아예 ‘우연’의 음악을 추구한 음악가들도 있는 데요, 존 케이지나 슈톡하우젠의 경우가 바로 그들입니다.

존 케이지. 한겨레 자료 사진
존 케이지. 한겨레 자료 사진

다이세쓰 스즈키의 선불교와 중국의 주역(周易)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존 케이지는 1954년 피아노곡 ‘4분33초’에서 우연성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피아니스트는 4분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가버리죠.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4분33초 동안 들려온 모든 소리, 즉 숨소리, 심장박동 소리, 관객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웅성대는 소리들 모두가 바로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또 ‘상상적인 풍경화 4번’에서는 12개의 라디오를 각각 다른 주파수에 맞춰놓고 두 사람이 볼륨 등을 조정하여 강연하는 사람의 말소리, 음악, 드라마 소리 등이 우연하게 흘러나와 그 조합으로 음악을 이루게 됩니다. 한국의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이러한 존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의 영향을 받아 바이올린을 내리쳐 박살내거나 피아노 몸체를 마구 두드리는 등의 해프닝 공연을 보여주기도 했죠.

슈톡하우젠. 한겨레 자료사진
슈톡하우젠. 한겨레 자료사진

독일의 전자음악 작곡가이자 프랑스의 피에르 불레즈, 이태리의 루이지 노노와 함께 유럽 현대 음악의 3총사로 불리는 칼하인츠 슈톡하우젠도 우연성의 음악을 실험했습니다. 그는 일상의 소리들을 녹음하고 그것을 전기적으로 왜곡시킨 뒤 다시 조합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음악철학은 “다른 소리와 연결이 된다면 어떤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다. 적절한 장소와 시간에 배치된다면 모든 소리는 값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1960년 ‘컨탁트’(Kontakte, Contacts)라는 작품에서 실제 악기 소리와 미리 녹음된 소리들을 사용해 작곡을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멜로트론이라는 지금의 샘플링 키보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악기를 고안해 사용했습니다. 이 멜로트론이라는 악기는 여러 건반들이 녹음 테이프 재생 장치와 연결되어 있어, 각각의 건반을 누르면 그에 해당되는 녹음된 소리가 흘러나오도록 만들어진 악기입니다.

비틀즈. 한겨레 자료사진
비틀즈. 한겨레 자료사진

비틀즈는 1967년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라는 노래에서 이 멜로트론을 사용했죠. 비틀즈 선집에 보면 폴 매카트니나 존 레논 등은 존 케이지와 슈톡하우젠의 ‘우연성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앨범 표지를 보면 비틀즈가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비틀즈는 이 앨범 표지에서 앨버트 아인슈타인, 카를 마르크스, 밥 딜런, 마릴린 먼로, 칼 융, 올더스 헉슬리 등 자신들이 영향받은 인물들의 얼굴을 담았습니다. 이 앨범 표지 맨 윗줄 왼쪽에서 5번째에 바로 슈톡하우젠의 얼굴이 있습니다.

비틀즈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앨범 표지. 맨위 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슈톡하우젠. 한겨레 자료사진
비틀즈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앨범 표지. 맨위 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슈톡하우젠. 한겨레 자료사진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 작품 ‘소년의 노래(Gesang der Junglinge)’와 비틀즈의 ‘투모로우 네버 노우스’를 비교해 들어보면 비틀즈가 슈톡하우젠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비틀즈는 슈톡하우젠이 사용한 테이프 루핑 녹음 기법(녹음된 소리가 계속 반복되게 하는 기법)을 자신들의 작업에 응용하여 썼죠. 비틀즈 쪽에서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앨범에 스톡하우젠의 얼굴사진을 쓰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보낸 편지에 스톡하우젠의 이름을 잘못 써서 그들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부랴부랴 전보로 다시 보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존 레논과 그의 아내 오노 요코는 1969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기까지 했구요.

슈톡하우젠 ‘소년의 노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5SjIK3fDKU
슈톡하우젠 ‘소년의 노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5SjIK3fDKU

비틀즈의 ‘투모로우 네버 노우스’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a3NcwfOBzQ
비틀즈의 ‘투모로우 네버 노우스’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a3NcwfOBzQ

비틀즈는 ‘레볼루션 9’ 노래에서는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추출한 샘플음들을 재배열한 뒤 백워드 매스킹(서태지의 노래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돌려 들으면 ‘피가 고파라’라는 소리가 난다고 누리꾼들이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킨 바로 그 백워드 매스킹)을 하여 소리를 담고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목소리, 오노 요코의 높은 허밍, 존 레논의 속삭이는 소리들을 녹음하여 집어넣기도 했죠. 슈톡하우젠의 영향은 다른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프랭크 자파와 데이비드 보위, 마일즈 데이비스, 뷔욕도 슈톡하우젠에게서 영향 받았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샘플링을 사용하는 힙합이나 테크노 일렉트로닉 음악도 ‘통제된 우연’을 음악에 사용했던 슈톡하우젠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구요.

존 케이지나 슈톡하우젠처럼 음악에 ‘우연’을 사용한다는 것은 지금도 조금 낯선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나 물리학적으로나 ‘우연’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 ‘필연’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1965년 프랑수아 자코브, 앙드레 미셸 르보프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자크 뤼시앵 모노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에서 생명현상의 기본인 단백질 구조의 철저한 ‘우연’ 현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슐린을 비롯한 수백 종의 단백질 아미노산 배열 순서를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거기에는 어떠한 법칙이나 상관관계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죠. 현대적 분석, 계산 수단을 동원해 얻어진 단백질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 법칙은 오로지 하나 ‘우연의 법칙’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본인 단백질 구조에서 ‘우연’ 이외의 신의 계시나 목적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충격감을 자크 모노는 자신의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죠.

물리학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비슷한 충격을 줬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물질의 기본 원소인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 빛을 비추면 전자는 빛에 의해 튕겨나가기 때문에 그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고 단지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고 한 불확정성의 원리 또한 ‘우연’이 인간의 물질적 밑바탕임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률’이라는 것은 ‘우연성의 크기’를 나타내는 다른 말이기 때문인 것이죠.

인간의 생명과 물질적 존재 기반마저 이렇게 우연성 가득한 것일진대, 그러한 인간이 만든 음악에 우연성의 요소가 들어가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도 인간에 있어서나 음악에 있어서나 모두 ‘필연’과 같이 관계 맺음을 통해 함께 하는 것이라고 불교의 연기론은 이야기 합니다. 연기란 모든 사물과 현상이 직접 원인인 인(因)과 간접원인인 연(緣)에 따라 그 관계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단백질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나, 우연성의 크기인 ‘확률’이 지배하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 또한 연기론에 의해 관계 맺음 될 수 있는 것이죠.

단백질 아미노산의 배열순서의 ‘우연’을 본 자크 모노는 그것이 ‘우연’인지 아닌지를 보려한 인(因)과 연(緣)을 통해 ‘우연’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빛을 비추어 전자를 보려했을 때, 전자가 빛에 의해 튕겨져 나가기 때문에 그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고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본 하이젠베르크 또한 그 사실을 보려한 인(因)과 연(緣)을 통해 ‘확률’을 볼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백질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는 자크 모노와의 관계,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하이젠베르크와의 관계라는 ‘필연’적인 연기(緣起)를 통해서만 그 ‘우연성’이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멜로디도 이와 마찬가지로 작곡가와의 인연(因緣)을 통해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죠. 라디오를 통해 우연하게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이 순간도, 저나 여러분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김형찬기자 chan@hani.co.kr
김형찬의 앱으로 여는 음악세상 http://plug.hani.co.kr/appsong/2235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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