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섭 경제부 정보통신전문기자
김재섭 기자의 @어바인 통신
나는 미국 와서 알게 된 교민 이름으로 가입된 이동전화를 쓰고 있다. “회사 것을 사용하게 돼 쓰던 게 필요없어졌다”며 “해지하려면 단말기 값을 토해내야 하니 쓰지 않겠느냐”고 해 받아서 사용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보장번호를 받지 못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동전화 서비스에 가입할 수 없었다.
미국에는 이동전화에 가입하면서 일정기간 사용하겠다고 약속하면 단말기를 공짜거나 싼 값에 주는 요금제가 있다. 내가 쓰고 있는 요금제의 경우, 2년 동안 의무 사용 조건으로 최신 단말기를 공짜로 주고, 월 35달러를 내면 추가 요금 없이 월 100분을 통화하게 한다. 약정기간에 따라서는 월 이용료를 깎아주기도 한다. 대신 약정기간을 채우지 않고 중간에 해지하면, 단말기 값이나 할인받은 요금을 물어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에 가입하면서 1~3년 이상 이용하겠다고 하면 모뎀을 공짜로 주거나 월 이용료를 5~15% 깎아준다. 물론 중간에 해지하면 물어내야 한다.
이런 요금제는 우리나라에서 먼저 선보였다. 1990년대 중반, 정부가 단말기 부품 수입 급증에 따른 무역수지 악화와 이동전화 요금인하 여력 상실 같은 이동전화 단말기 보조금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보조금 지급 폭에 대한 규제를 시작할 때 이동전화 업체들이 일정기간 이용을 약속하면 단말기를 거저 주는 상품을 내놨다. 하지만 이 상품은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서비스 해지를 막는다는 지적을 받아 얼마 못가 폐지됐다. 의무사용기간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단말기를 분실했거나 망가뜨린 소비자들이 단말기를 다시 공짜로 얻기 위해 다른 업체에 새로 가입하려는 경우 이전에 받은 보조금을 물어내야 했다. 후발 이동통신 업체와 단말기 제조업체들도 가세해 목소리를 키우자 정부가 없애도록 했다.
이동전화 단말기 보조금의 부작용 가운데 무역수지 악화 문제는 부품 국산화율 증가 등으로 어느 정도 해결됐다. 하지만 단말기를 잘 관리하며 오래 사용하는 소비자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고, 기업들도 소모적인 마케팅 경쟁으로 인한 문제가 남아있다.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2~3년 이상 사용하겠다고 약속하면 단말기를 거저 주는 요금제를 다시 도입하면 어떨까?
이동통신 업체들은 그동안 단말기 보조금을 몰래 주다 적발될 때마다 “저쪽에서 주니 우리도 방어 차원에서 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의무사용기간을 설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특정 업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업계 주장도 설득력을 잃었다는 얘기다. 대신 이 요금제를 도입하려면 가입자의 동의를 명시적으로 받는 장치를 둬야 한다. 신분증으로 본인 여부를 확인하고, 가입자 본인의 자필 서명을 받은 경우 등으로 제한해야 한다. 일부 대리점 및 소비자들이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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