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구제금융 커질수록 미 정부 재정적자 가속
이라크전 수렁에다 월가 위기로 영향력 약화
이라크전 수렁에다 월가 위기로 영향력 약화
‘제국’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미국 <시비에스>(CBS) 방송은 17일(현지시각) “미국 연방정부(엉클 샘)가 곤경에 처한 큰 회사들을 구하러 백마를 타고 온 ‘금융 기사’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아이러니는 정작 엉클 샘 자신이 거대한 재정 문제에 빠졌다는 사실”이라며 “누가 엉클 샘을 구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일방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밀어붙이다 대외 지도력에 큰 상처를 입은 미국이, 이번엔 ‘월가’발 금융위기로 세계 헤게모니의 또다른 주요 수단인 금융자본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이번 금융위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를 뒤흔든 1970년대 초반 ‘달러쇼크’에 비견될 만하다. 당시 치솟는 금값과 경상수지 적자가 겹치면서 불과 3~4년 만에 달러 가치가 8분의 1로 폭락했다. 두 손을 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달러와 금의 교환을 정지시켰고, 이로써 세계 금융질서인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졌다.
30년 전과는 다른 양식으로 찾아온 위기 앞에서 수천억달러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어야 할 미국 정부는 정작 9조6340억달러의 빚으로 얼룩져 있다. 이는 미국의 연간 국내총생산의 69%에 이른다. 올해에도 4070억달러의 재정적자가 연방정부의 회계장부에 추가될 전망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최고 등급(AAA)인 미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될 수 있다고 17일 경고했다. 세계경제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체면이 크게 구겨졌다.
미국 재무부는 17일 자금에 쪼들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요청에 따라, 35일 만기의 400억달러어치 국채를 발행한 데 이어, 18일 600억달러의 국채를 추가로 발행했다. 영국·일본·캐나다 등 다섯 나라 중앙은행으로부터 추가로 약 1800억달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조처도, 결국 미국의 힘과 돈만으로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보여준 셈이다. 이런 탓에 지난 한 달에만 929억달러의 외국인 투자자금이 미국 땅을 떠났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지금껏 쏟아부은 나랏돈의 5~10배인 1~2조달러를 더 집어넣어야 금융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번 금융위기가 미국이 앞서 극복했던 70년대 달러쇼크와 ‘오일쇼크’, 2001년 ‘닷컴 버블’ 등 여러 위기의 하나로 기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처럼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심장 노릇을 하고 있는 거대 투자은행들이 통째로 날아간 적은 30년대 대공황 이후 처음이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 관영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는 18일 ‘월가에 동시다발 폭풍이 몰아닥친 9월15일은 세상을 바꾸는 날이 될 것인가’라는 도발적 제목의 기사에서 바크트만 스웨덴 웁살라대 교수 말을 인용해 “백악관에 문제가 생긴다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월가에 문제가 생기면 상황이 다르다”라고 보도했다.
이런 큰 위기의 성격 탓에 영국 일간 <가디언>은 “미국이 어떤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다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할테고, 이런 시도는 다른 국가의 야망과 맞물려 새롭고, 갈수록 위험한 충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국’에 드리운 먹구름이 노폐물을 씻어낼 소나기가 될까, 아니면 제국을 침몰시킬 홍수가 될까?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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