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촛불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유월민주항쟁의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승리를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다. 만민이 요구하면 이루어진다는 신념과 자신감이 있기에 과격할 이유가 없었다. 지난 넉 달 하고도 보름 동안 평화롭게 촛불시위가 벌어진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한겨레> 금요일 치의 기명 칼럼은 8명의 필자가 번갈아 쓰고 있어서 두 달 만에 돌아오는지라 글쓰기에 다소 여유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전공을 넘어선 글은 잘 쓰지 않고 어쩌다 벗어났다 해도 삶과 문화에 관한 소견이어서 시류를 타지 않는다. 세상이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내가 하는 일은 변함없이 문화유산과 함께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문화보국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촛불시위가 일어나면서 나 또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동참하지 않을 수 없어 지난번 칼럼에서는 ‘원칙과 근본이 흔들린 답은 오답이다’라는 제목으로 “안 내려오면 끌어내려라, 그게 답이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런데 이 ‘웬수’ 같은 상황이 쇠귀신처럼 질겨 곧바로 끝장이 나지 않고 또 두 달을 넘겨 내 칼럼 날짜가 돌아왔는데 하필이면 3월10일치 아침 신문이란 말인가. 본래 원고 마감이 이틀 전인지라 기다리다 못해 8일 오전에 써서 이미 송고했는데 저녁때가 되자 헌법재판소에서 10일 11시에 선고한다고 공표했으니 나는 불가불 원고를 다시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문에 글을 쓰면서 이처럼 난처한 경우가 내게 한 번 있었다. 2002 월드컵 때 <한겨레>에서는 축구 관전평에 인문정신을 불어넣는다고 장안의 글쟁이들을 동원한 바 있다. 그때 나는 관전평보다도 축구경기를 구경시켜준다는 것에 끌려 필자 순번을 정할 때 16강 경기를 쓰겠다고 자원했다. 우리 팀이 16강을 넘지 못하면 축구 구경만 하고 관전평은 안 써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우리는 진짜 대망의 16강에 올라 이탈리아와 맞붙게 되었는데 저녁 8시에 경기가 시작되어 9시45분에 끝나면 10시 반까지 원고를 넘겨야 다음날 아침 신문에 실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기장은 대전이었다.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질 것으로 생각하고 비록 패배했어도 그동안 잘 싸운 우리 축구팀을 칭송하는 글을 미리 써서 신문사에 보내놓고 대전 경기장으로 갔다. 그러자 담당 기자가 만에 하나 이겼을 때를 가정한 글도 달라고 해서 아무 감흥도 없이 우리는 실력보다 더 큰 성취를 하고 있다며 논리학에서 말하기를 형식이 내용을 넘어서면 내용이 붕괴된다고 했으니 우리는 승리에 도취해서만은 안 된다는 요지로 마지못한 글을 써서 보냈다.
그런데 그날 경기는 아시다시피 연장전까지 들어가 밤 10시 반에 우리 팀의 드라마틱한 승리로 끝났다. 그 감격적인 순간을 담지 못한 관전평이 그대로 신문에 실린 것이 지금도 부끄럽다.
다만 그때 내가 미리 관전평을 써 둘 수 있었던 것은 승패를 떠나 우리가 크게 얻은 것은 붉은 악마의 환상적인 응원문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탄핵이 인용되든 안 되든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서 내가 자신있게 말하고 싶은 것은 저 감동적인 촛불시위다. 인류 문명사에 이런 시위가 언제 어느 나라에 있었던가 싶다. 누가 뭐래도 3·1운동,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유월민주항쟁에 이르는 줄기찬 민주화 민권운동의 흐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 쾌거이다.
“염병하네”를 연창한 특별검사 사무실의 미화원 임순애 여사가 촛불시위 무대에서 “저는 60이 넘어서 청소를 하고 있지만 자식들 키우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 그런데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나라를 망쳐놓고 큰소리로 소리지르는 것을 보니까 화가 치밀고 너무너무 못 견뎌서 한마디 던졌다”는 ‘사이다 발언’을 들으면서 나는 1898년 10월29일 서울 종로 보신각 광장에서 열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때 백정 박성춘이 했다는 연설문이 떠올랐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 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利國,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과 편민(便民,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국운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연예인 사회자 김제동이 전국을 순회하며 열고 있는 만민공동회의 출발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에서 1년 뒤 경운궁(덕수궁)으로 환어하면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시점에서 일어났다. 당시 외세의 내정 간섭과 수구파에 의해 국정 개혁이 막히자 마침내 독립협회가 주도한 최초의 민중대회였다.
1898년 3월에 첫 집회가 열린 이후 10월에는 독립협회가 나서지 않았음에도 1만명이 모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명이었으니 오늘날과 비기자면 30만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 만민공동회에는 전·현직 관료와 각종 단체 회원,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 등 그야말로 만민들이 참석했으니 오늘의 촛불시위와 모임의 성격이 같다.
만민공동회는 시국에 대한 개혁안을 담은 ‘헌의(獻議) 6조’를 고종 황제에게 건의했다. 대한제국의 자주적 국권을 공고히 하고, 각종 이권과 조약, 인사는 정부가 중추원과 협의하고, 공정한 재판을 통해 민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갑오개혁 이후 각종 법률의 실행을 촉구했다. 결국 고종은 10월30일 ‘헌의 6조’의 시행을 약속하고, 독립협회의 요구를 반영한 ‘조칙(詔勅) 5조’를 반포했다.
이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중추원의 기능을 강화하여 입헌군주제로 갈 것을 요구했으나 전제군주제로 몰고 가려는 수구파의 준동과 모함에 막히고 말았다. 이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국가체제를 공화정으로 바꿔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삼고 각부 장관에 독립협회 회원을 앉히려 한다”고 ‘가짜 뉴스’를 퍼트렸다.
그러자 고종은 만민공동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독립협회 해산을 지시했으며 이상재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하여 구속했다. 이에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려 구속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으나 집회는 갈수록 강경한 양상을 띠었다.
이에 정부는 독립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 보부상들의 모임을 주축으로 만든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맞불 집회’를 열었고 결국 만민공동회는 12월23일 군대와 보부상들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틀 뒤인 25일에는 독립협회도 창립 30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120년 전 만민공동회는 아직 민주역량이 배양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그 위대함이 있다. 다만 시대적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의 정신은 3·1운동으로 이어졌고 또 오늘의 촛불시위로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유월민주항쟁의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승리를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다. 만민이 요구하면 이루어진다는 신념과 자신감이 있기에 과격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눈물날 정도로 감격적이다.
경복궁 광화문 앞에 광장이 만들어진 것은 10년도 안 되지만 광화문 광장은 촛불시위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이제 촛불시위는 광화문 광장의 중요한 내용으로 되었다. 논리학은 말한다. 형식을 지배하는 것은 내용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형식은 다음 내용을 규정한다고. 지난 넉 달 하고도 보름 동안 평화롭게 촛불시위가 벌어진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명지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