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천우신조로 밝은 태양 아래 들꽃이 만발한 천지를 한없이 만끽했다. 안내원도 이렇게 좋은 날은 몇년 만이라며 남쪽에서 손님 온 것을 천지도 환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천지에서 내려온 우리는 삼지연 마을 가까이 숲속에 자리잡은 배개봉려관에 묵어갔다. 저녁 식단은 이 지방의 특산물로 차려졌다. 천지에서 잡은 산천어 구이와 백두산 들쭉술 그리고 감자구이가 나왔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보름간 우리 선수들의 경기를 응원하고 메달 획득에 박수를 보내며 어느 때보다 즐거운 겨울날을 보냈다. 이번 올림픽에 유난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북 화해의 물꼬가 트인 평화올림픽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올림픽이 끝나면 남북정상회담이 원만하게 성사되어 다시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바란다. 그리하여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미완의 장으로 남겨둔 제3권 함경도편을 마저 써서 완결짓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지난 8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에 초대받아 갔을 때 무대 스크린에 비친 백두산 삼지연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회가 일어났다. 나는 1998년 7월 권영빈 단장이 인솔한 방북취재단의 일원으로 시인 고은, 소설가 김주영과 함께 보름간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때 우리는 마지막 코스인 백두산을 답사하기 위하여 황공하게도 평양에서 전세기 편으로 삼지연 공항까지 날아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북한 땅의 모습은 온통 산자락으로 이어져 들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3D로 보는 듯하였다. 나는 지리 시간에 배운 대로 동서로 가로지르면 묘향산맥과 적유령산맥일 것이고 남북으로 내려뻗으면 낭림산맥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창가에 바짝 붙어 눈이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얼마만큼 날아가니 정말로 산줄기가 남북으로 치달리면서 그 너머로 넓은 고원이 나타났다. 낭림산맥 지나 개마고원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개마고원은 바늘잎나무들이 천연원시림을 이루고 있어 뾰족한 나무 끝이 마치 모판에 심어진 벼 포기처럼 빼곡히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아! 한반도에 이런 자연풍광이 있다니. 아마도 우리 비행기는 삼수와 갑산을 지나 삼지연 공항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바둑을 즐겨 두는 나는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끊고 본다”는 그 말뜻을 되뇌며 만약에 개마고원에 호수가 보이면 그것은 분명 장진강, 부전강, 허천강 수력발전소가 있는 저수지일 것이라며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이쪽저쪽 창으로 분주히 옮겨다녔다. 세 발전소가 생산하는 약 80만 킬로와트와 수풍발전소의 약 73만 킬로와트의 전력이 8·15 해방 이전 우리나라 전국에 전기를 보급했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보고 싶었다. 그러자 멀리 작은 호수가 보였다. 나는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기 있는 호수가 장진호입니까?” “장진호는 아까 지났습니다. 여기는 갑산이니 허천인가 봅니다. 근데 교수 선생은 어떻게 장진호를 다 압니까?” 안내원은 아마도 1·4 후퇴 때 격전지였던 장진호 전투를 염두에 두고 물은 것 같았다. “장진호 아래쪽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있잖아요.” “황초령비는 지금은 함흥력사박물관에 있단 말입니다. 교수 선생은 아는 건 많아도 제대로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나는 결코 질 의사가 없어서 되받아쳤다. “안내원 동무는 허천이 왜 허천인 줄 압니까?” “평양 사람인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개마고원은 수원이 얕아 비가 올 때는 내가 흐르지만 평소에는 냇물이 없어서 빌 허 자, 내 천 자, 허천이라고 합니다. 순우리말로 빈 내입니다. 남쪽에서는 이런 경우 마른 내라고 해서 마를 건 자, 건천이라 합니다.” “야! 교수 선생은 이미 북한 답사기를 다 써놓고 이제사 구경 왔구나.” 이윽고 우리의 비행기가 삼지연 공항에 도착하였다. 삼지연은 해발 약 1400미터의 평평한 고원지대에 있어 7월인데도 서늘했다. 백두산의 날씨는 9월이면 눈이 내려 이듬해 5월까지 눈으로 덮이므로 6~8월 삼개월 안에 봄 여름 가을이 전개된다고 한다. 삼지연은 이름 그대로 세 개의 호수가 나란히 붙어 있으며 가장 큰 호수에는 작은 섬이 있어 엷은 시정을 자아낸다. 안내원은 우리를 항일 빨치산 전적비로 안내한 다음, 해 지기 전에 천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한다며 서둘러 자동차에 오르게 했다. 천지까지는 찻길로 약 40킬로미터, 한 시간 안쪽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사뭇 평평한 비탈길이었다. 길 좌우로는 바늘잎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마치 천연원시림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저 나무가 무슨 나무냐고 묻자 안내원 대신 운전사가 대답했다. “삼지연 입구는 전나무이고 지금 이쪽은 이깔나무, 저쪽은 가문비나무입니다.” “낙엽 지는 나무는 없습니까?” “많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작나무도 있고 사스래나무도 있습니다.” “짐승도 많습니까?” “사슴, 토끼, 담비, 사향노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멧닭이라고 아십니까. 산닭 말입니다. 이게 우리 천연기념물이란 말입니다.” “아! 저 숲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고 싶군요.” “저 안에 들어갔다간 5분도 못 되어 제꺽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는데 갑자기 풍광이 바뀌어 이깔나무들이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치고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듬성듬성하여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조만간 고산지대가 나올 기세다. 삼지연에서 천지까지 가는 동안 풍광은 그렇게 계속 바뀌었다. 처음에는 바늘잎나무 숲, 두번째는 듬성듬성 바람에 시달리는 나무들, 세번째는 온통 감자밭을 이루는 넓은 고원이 펼쳐진다. 그러다 들꽃이 낮게 깔린 산자락이 이어지다가 이내 백두산 준봉들이 홀연히 나타난다. 내 느낌에 10분마다 풍광이 바뀐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장중하고 느린 선율의 그레고리안 찬트를 눈으로 보는 듯했다. 그러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와 들꽃의 처연한 아름다움에서는 바흐의 칸타타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발 2750미터, 백두산 상상봉(장군봉)을 곁에 두고 400미터 발아래로 펼쳐지는 천지를 내려다보는 환상적인 풍광이 펼쳐진 순간 그것은 여지없는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이었고 환희의 합창이었다. 그날 우리는 천우신조로 밝은 태양 아래 들꽃이 만발한 천지를 한없이 만끽했다. 안내원도 이렇게 좋은 날은 몇년 만이라며 남쪽에서 손님 온 것을 천지도 환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천지에서 내려온 우리는 삼지연 마을 가까이 숲속에 자리잡은 배개봉려관에 묵어갔다. 저녁 식단은 이 지방의 특산물로 차려졌다. 천지에서 잡은 산천어 구이와 백두산 들쭉술, 그리고 감자구이가 나왔다. 특히 감자는 이곳의 특산 중 특산이었다. 북한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삼수 갑산 혜산 개마고원 삼지연에 이르는 지역을 양강도라고 부른다. 양강도 감자는 크기가 갓난애 머리만하고 벌방지대 감자와 달리 전분이 많아서 달다. 이곳에서 감자는 부식이 아니라 주식이다. 오월 단오 때부터 햇감자로 밥을 짓는데 보리쌀과 땅콩을 약간 섞은 감자밥은 대단히 향기롭고 상긋한 맛을 내며 소화도 잘된단다. 양강도 감자 중 백두산 감자는 첫서리를 맞고 9월에 캐기 때문에 ‘언감자’라고 한다. 그날 우리 저녁상에 나온 것은 가장 인기 있다는 언감자농마국수였다. 언감자로 뽑아낸 국수오리가 쇠심줄처럼 질기면서 오들오들 씹히는 맛이 아주 고소했다. 꾸미로는 쇠고기와 닭고기를 섞어 썼고 국물은 콩깨국이었다. 우리는 이틀 묵어가는 동안 이 집 감자요리를 다 먹고 가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접대원은 가당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욕망이외다. 우리 식당엔 감자요리가 여든두 가지 있습니다. 감자찰떡, 감자묵, 언감자지짐, 농마지짐, 막가리지짐, 막가리국수, 오그랑죽…” 아! 삼지연에 다시 가고 싶다. 삼수 갑산의 허천도 보고 싶고, 황초령과 마운령의 순수비, 일본에서 찾아다 길주에 복원한 북관대첩비도 보고 싶다. 그것이 정녕 ‘욕망’이 아니길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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