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잇.”
잠수를 마치고 수면에 오른 점박이물범 한 마리가 해녀가 내는 듯한 휘파람소리를 내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지난 23일 서해 최북단 백령도 진촌리 하늬바닷가 암초지대에 물범 30여 마리가 안개 깔린 잔잔한 수면을 미끄러지듯 유영하고 있었다. 커다란 검은 눈과 장난기 어린 표정이 쌍안경에 떠올랐다. 이들은 물범 수백마리가 촘촘히 올라가 햇볕을 쪼이던 물범바위를 벌써 이틀째 어민들에게 내준 채 인근 바다로 쫓겨온 무리다.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내는 물범바위는 진촌리 해안에서 800m쯤 떨어진 물범의 핵심 휴식지다. 국립환경과학원 조사에서 하루에 252마리까지 여기서 관찰되기도 했다. 암초 지대 밖에는 조류가 거세 접근이 힘들지만 안은 잠잠한데다, 물밑엔 다시마 등 해초밭이 펼쳐져 우럭·노래미 등 물범이 좋아하는 먹이도 풍부하다.
이런 수산자원은 어민들에게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옹진군 순시선을 타고 22일 찾은 물범바위 주변에 어선 3척만 눈에 띄었다. 지난달 이곳을 조사한 백용해 녹색연합 연안보존위원장은 “물범바위 주변 바닷속에서 낚싯바늘과 줄, 봉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뱃머리를 서남쪽으로 돌려 대청도가 건너다보이는 연봉바위로 향했다. 물범의 또다른 주 서식지인 이곳도 어선과 낚시꾼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쪽 끄트머리에 물범 30여마리가 암석 위와 수면에서 쉬고 있었다. 머리와 다리를 배 모양으로 팽팽하게 당긴 채 해바라기를 하는 모습이 독특했다. 섬 북서쪽 두무진 선대암 근처는 관광명소가 되면서 물범을 보기는 극히 힘들어졌다. 유람선의 요란한 엔진소리와 유행가, 안내원의 마이크 소리가 경쟁하듯 울려퍼졌다.
서해 생태계의 우두머리 점박이물범이 먹이와 쉼터를 놓고 어민들과 힘겨운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이 해양포유류는 중국 발해만의 얼음바다에서 새끼를 낳은 뒤 북한 해안을 거쳐 백령도까지 내려와 여름을 보내는 장거리 여행가다. 하지만 천혜의 서식지인 백령도조차 이들에겐 점점 시끄럽고 위험하며 배고픈 곳으로 바뀌고 있다.
물범은 원래 바닷가에 산다. 국립환경과학원 원창만 박사는 “물범이 해변이 아닌 암초에서 서식하는 곳은 세계에서 백령도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람의 위협이 계속되면서 행동변화가 왔을 것이란 얘기다. 원 박사는 과거 물범이 해변에까지 와 쉬었고 울음소리가 시끄러워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는 어민들의 증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장산곶이 건너다보이는 긴장된 군사적 상황도 물범이 해안을 기피하게 만든 원인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근무했던 예비역 군인들은 해안에 접근하는 물범을 오인사격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고 말했다.
점박이물범은 1940년대에 개체수가 8천마리에 이르렀지만 현재 1천마리 미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 박사는 “개체군의 90% 이상이 지난 40년 사이 사라진 감소추세는 호랑이보다 더 빠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에서 밀렵이 성행했고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한자보 랴오닝성 해양수산과학연구원 부원장은 “올 1월 말 헬기를 타고 발해만 번식지를 4시간 동안 샅샅이 조사했는데 물범을 단 한 마리밖에 보지 못했다”며 감소 추세를 우려했다.
갈수록 줄어드는 수산자원을 둘러싼 어민과의 경쟁도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한 박사는 “물범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조류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 먹이 부족으로 미처 털갈이를 하지 못한 새끼도 서둘러 조류를 타고 남행길에 나서기도 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과 달리 어민들은 전에 비해 “물범이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먹이가 부족해지면서 그물에 걸린 먹이 주위로 물범이 몰려들어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도 높다.
지난 22일 서해 대청도와 백령도 사이에 위치한 연봉바위에서 점박이물범들이 쇠가마우지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어민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어서 맘 편히 쉴 곳은 못 된다.
원창만 박사는 “특별한 대책이 없다면 점박이물범의 멸종은 시간문제”라며 “남북한과 중국이 네트워크를 구성해 연구와 보존에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태관광을 통해 어민과 물범의 공존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박정운 녹색연합 자연생태국장은 “물범과 더불어 살아온 어민의 경험과 전문가의 지식이 만나야 올바른 보호·관리 방안이 나온다”며 물범과 어민이 상생하는 백령도 그린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백령도/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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