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한국의 숲 3 철원 소이산
아까시 등쌀 뚫고 갈참·때죽나무 등 토종수종 생명력
논밭은 습지·숲으로…“출입통제 덕 평지숲 원형 간직”
논밭은 습지·숲으로…“출입통제 덕 평지숲 원형 간직”
텃밭이 딸린 집터를 60년쯤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흙먼지 날리던 학교 운동장은 그 기간 동안 어떻게 바뀔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가면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뒤 군사 목적으로 매설한 지뢰가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사요리 산1번지가 주소인 소이산(해발 362m)을 찾았다. 북한이 1946년 지은 3층짜리 건물인 노동당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이다. 산을 희게 물들이고 있는 아까시나무 꽃을 따라온 양봉가의 벌통이 널려 있었다.
소이산은 민통선 밖에 있지만 주요한 군사시설이 많아 출입이 통제돼 왔다. 전쟁으로 교란된 읍내 야산이 반세기 동안 스스로 변화해 온 모습이 간직돼 있다.
일제 때 사방림과 연료림으로 많이 심은 아까시나무가 아직도 숲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길가에 무리지어 돋아난 외래종이자 생태교란종인 단풍잎돼지풀은 오래된 군사기지임을 말해준다.
동행한 마상규 박사(한국산림기술인협회 회장)는 “이곳은 외래종인 아까시나무가 향토수종에 앞서 황폐한 땅을 선점한 이후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나갈지를 생태사회학적으로 연구할 최적지”라고 말했다.
산 중턱 이후부터는 아까시나무가 줄고 생강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등 토종 나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놔두면 아까시나무가 산을 점령할 것이란 우려는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소이산 정상에 오르자 눈앞이 확 틔었다. 주변과 표고차가 200여m밖에 안 되지만 1000m급 고산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널찍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 북한의 평강고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산이 없었다면 전쟁 때 철원평야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김준락 공보참모의 설명이 실감났다.
소이산은 철원평야 논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철원평야를 한눈에 굽어보는 가치 때문에 이곳엔 고려 때부터 봉수대가 설치됐다.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로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이 다녀 관광객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철원군지>에 실린 1930년 소이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산밑에까지 크고 작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농산물검사소 등 과거의 주요 건물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마상규 박사는 “통일이 돼 철원에 평화도시가 조성된다면 소이산은 그 조망점으로서 서울의 남산과 같은 구실을 할 것”이라며 “평화의 숲이자 도시의 산림공원으로서 보전하고 개발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생명의 숲’이 2006년 소이산을 ‘천년의 숲’ 수상지로 선정한 것도 ‘평화의 숲’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서였다.
소이산의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이다. 노동당사에서 국도 87호선을 따라 대마리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옛 철원의 시가지였지만 지난 60여년 동안 지뢰 통제구역으로 묶였다.
그동안 묵논은 습지로, 묵밭과 집터는 숲으로 바뀌었다. 소이산 자락에서 출입영농을 하는 현응기(71)씨는 “지뢰지대 안에 고사리와 고라니가 많지만 폭발사고가 나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생태조사는 이뤄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소이산의 생태적 가치가, 훼손이 심한 산 위보다 산자락의 지뢰지대가 높을 것으로 본다. 도로를 따라 지뢰지대를 보면 아까시나무, 버드나무, 신나무와 함께 마을에서 심어 기르던 호두나무, 뽕나무 등도 눈에 띈다. 마 박사는 “지금은 모두 사라진 서울의 평지 숲의 원형이 여기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소이산 건너편의 지뢰지대는 넓은 초지를 키 큰 포플러와 아까시나무가 둘러싼 모습이 독특하다. 해방 때 2600여명의 졸업생을 냈던 철원공립보통학교 터이다. 운동장은 초원이 됐고 귀퉁이는 고랭이, 부들 등이 자라는 습지가 됐다.
온대지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간섭이 중단된 채 생태계의 천이와 복원이 이뤄진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쟁의 유물인 지뢰밭이 지킨 숲의 가치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김명진 국립환경과학원 자연평가연구팀장은 “최근 민통선 지역인 백암산에서 멸종위기 1급의 사향노루 서식지가 발견된 것처럼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민통선 인근 지역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생태적 가치가 발견될 잠재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철원/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이 기획은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사업단 녹색자금)의 지원으로 마련됐습니다.
철원 소이산은 해발 365m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은 철원 소이산의 전경.
소이산의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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