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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아무에게도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 나는 나다

등록 2016-07-22 20:02수정 2017-04-11 11:23

[토요판]어쩌면 - 무성애를 말한다
6월11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린 제17회 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올해는 처음으로 무성애자들도 부스를 설치하고 행사에 참여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6월11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린 제17회 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올해는 처음으로 무성애자들도 부스를 설치하고 행사에 참여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크라우드펀딩 방식을 통해 책 한 권이 지난달 세상에 나왔습니다. 목표 금액의 910%가 모였습니다. 국내 무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펴낸 ‘에이로그 북’입니다. 지난달에 열린 제17회 퀴어문화축제에는 처음으로 무성애자 부스가 등장했습니다. 무성애자들은 유성애 중심 사회가 성적 끌림을 강요한다고 말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엔 성적 끌림 이외에 로맨틱 끌림도 있을 수 있으며, 이 둘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합니다. 무성애 활동가의 목소리를 직접 전합니다.

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성애자입니다. 지금까진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무성애 가시화 운동’을 통해 세상에 꾸준히 알려지는 중입니다. 무성애 가시화 운동이란 사회를 향해 무성애자의 존재를 알리는 운동을 말합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지난해 국내에서도 무성애 블로그인 ‘에이로그’(A-LOG)가 탄생했습니다. 올해 6월에는 무성애자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에이로그 북’(A-LOG Book)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제작됐고,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진행된 퀴어문화축제에서는 ‘에이로그 팀’이 최초로 무성애 부스를 차리기도 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이 운동을 앞장서 진행하고 있는 단체로는 무성애 가시화 그리고 교육 네트워크라는 의미를 지닌 ‘에이븐’(AVEN, Asexual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2001년 미국의 무성애 활동가인 데이비드 제이에 의해 만들어져,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무성애자 커뮤니티로 성장했습니다.

‘성적 욕구’의 줄임말 아닙니다

무성애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합니다. 애초부터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다, 그나마 의미를 짐작하려 할 때 주로 ‘성욕’이라는 단어부터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무성애자를 ‘성욕이 없는 사람’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성애를 정의할 때 사용되는 개념은 성적 끌림입니다. 성적 끌림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욕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성적 끌림이란 끌린 대상과 성적 접촉을 하고자 하는 정서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힘을 말합니다.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을 유성애자,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무성애자라고 합니다.

많은 유성애자들은 성적 욕구가 성적 끌림과 강력하게 연관돼 있는 나머지 이 두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성욕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성욕은 단순히 성적 욕구의 줄임말이 아닙니다. 성욕은 용례에 따라서 더 광범위하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무성애를 묘사할 때는 성욕이라는 단어를 성적 본능, 성적 욕구, 성적 끌림 등으로 세분화합니다. 정리해 보자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성적인 관념이 성적 본능이고, 그 성적 본능이 욕구의 형태로 발현되면 성적 욕구입니다. 성적 욕구가 대상을 향하도록 하는 힘을 성적 끌림이라고 부릅니다.

무성애 상징물
무성애 상징물
성적인 흥분이나 성적인 관심을 느끼되 대상에게 성적인 접촉을 하고자 하는 끌림이 없는 경우는 유성애자한테서도 종종 발생합니다. 하지만 성적 욕구와 성적 끌림을 모두 경험하는 유성애자로서는 성적 끌림 없이 발생한 성적 욕구를 의미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 결과 성적 욕구와 성적 끌림을 나눠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적 욕구와 성적 끌림을 나눠 생각하려는 노력이 무성애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무성애는 성지향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적 지향 혹은 성정체성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성지향성은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고유한 성질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지향성은 주로 ‘어떤 성별’의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느냐와 관련돼 논의가 이뤄져 왔습니다. 이에 따라 성적 끌림을 동성에게 느끼면 동성애자, 이성에게 느끼면 이성애자 식으로 불려졌고, 이 밖에 양성애자, 범성애자, 남성애자, 여성애자 등도 성지향성에 속합니다.

하지만 에이븐은 성지향성을 조금 다르게 정의합니다.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죠. 에이븐에 따르면, 성지향성이란 “각 개인이 느끼는 성적 끌림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성애자가 보기에 성지향성이란 ‘어떤 성별’의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지를 넘어, 성적 끌림을 ‘얼마나 자주’ 느끼는지, ‘어느 만큼의 강도’로 느끼는지에 대한 묘사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런 정의에 따르자면 성적 끌림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유성애, 회색무성애, 무성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위에 혹시 성적 끌림을 매우 드물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회색무성애자일 수 있습니다. 회색무성애자들은 “지금까지 생애에서 한두 번 정도 성적 끌림을 느껴봤다”고 말하곤 합니다.

올해 퀴어문화축제 현장의 무성애자 부스. 에이로그 트위터 갈무리
올해 퀴어문화축제 현장의 무성애자 부스. 에이로그 트위터 갈무리
로맨틱, ‘합의된 긴밀한 관계’ 설명틀

“그럼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려는 것 아니야?” 무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을 때 주위로부터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오해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요? 유성애자 중에서 독신을 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며, 무성애자 중에서도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퀴어플라토닉’ 관계라는 대안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지는 않지만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무성애자를 설명하고자 등장한 게 바로 ‘로맨틱’ 개념입니다. 앞서 말한 오해가 널리 퍼진 이유도 유성애 중심적 사회는 성적인 개념과 로맨틱 개념을 분리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맨틱이란 단어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로맨틱하다’와 같은 특정한 감정 상태나 연애 관계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로맨틱 개념의 ‘로맨틱’은 흔히 말하는 ‘로맨스’, ‘로맨틱하다’에서 사용된 의미와는 약간 다릅니다. 로맨틱 개념은 누군가와 서로 합의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원하는지에 따라 정의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긴밀한 관계의 대표적 예로는 연애나 퀴어플라토닉 관계가 있습니다. 퀴어플라토닉 관계란 당사자 간의 유대감을 주된 정서로 하여, 언약 단계라 부르는 합의 단계를 거쳐 형성하게 되는 관계입니다. 연애에 빗대자면, 고백을 하고 승낙하는 단계가 퀴어플라토닉 관계의 언약 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퀴어플라토닉 관계라 하더라도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각 당사자의 지향성에 따라 연애와 유사한 모습을 띨 수도 있고, 강한 우정으로 이어진 친구 사이와 같은 모습을 띠기도 합니다.

성적 끌림 강요하는 유성애 사회
성지향성의 하나인 ‘무성애’ 주목
국내에서도 무성애자 책 출간되고
퀴어문화축제에서 첫 부스 등장

‘성욕 없는 사람’이라는 오해·편견
장애나 트라우마 탓 ‘비정상’ 딱지
성적 끌림 없어도 긴밀한 관계 가능
성지향성과 로맨틱 지향성은 독립적

처음 로맨틱이라는 이름이 지향성에 붙은 이유는 연애와 같은 관계가 이미 규범화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연애 관계는 대개 성적 접촉이 잠재적으로 허락된 관계라고 인식되며 때때로 성적 역할을 수행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가해지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퀴어플라토닉 관계는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의 성지향성이나 젠더정체성에 상관없다는 점과 성적 접촉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밖에도 퀴어플라토닉 관계는 연애에 부여된 다양한 규범성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무성애자 중에서는 연애 이외에 퀴어플라토닉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로맨틱 개념은 ‘합의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느냐 그러지 않느냐’를 논하는 개념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무성애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펴낸 ‘에이로그 북’. 에이로그 블로그 제공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무성애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펴낸 ‘에이로그 북’. 에이로그 블로그 제공

사회가 외려 트라우마 만들어내

그래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를 로맨틱 욕구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대상과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끌림을 느끼게 되면 그것이 로맨틱 끌림입니다. 무성애자들 중에서 로맨틱 끌림을 느끼는 사람들을 로맨틱 무성애자라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적으로 끌리지는 않지만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무성애자입니다. 성지향성과 마찬가지로 로맨틱 지향성도 끌리는 대상의 성별에 따라 동성 로맨틱, 이성 로맨틱 등으로 나뉘는데, 로맨틱 끌림을 느끼는 정도나 양상에 따라서도 다양한 분류나 유형이 존재합니다.

에이븐에서 제시하는 끌림 모델은 성적 끌림과 로맨틱 끌림이 독립적인 지향성을 형성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각각을 성지향성과 로맨틱 지향성이라고 부릅니다. 두 가지 끌림이 독립적인 지향성을 형성한다는 말은 한 사람의 성지향성과 로맨틱지향성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로맨틱 무성애는 성지향성과 로맨틱 지향성이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일 뿐, 성지향성과 로맨틱 지향성이 일치하지 않는 지향성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무로맨틱 유성애자의 경우 끌린 대상에게 성적 접촉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지만 그 대상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끌림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양성로맨틱 이성애자의 경우 이성 외에 다른 성별의 사람에게도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끌림을 느끼기도 하지만 성적 접촉을 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성에게만 느낍니다.

무성애자로 살아가다 보면 사회가 부여하는 규범적인 가치와 충돌하거나 사람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편견으로 곤란을 겪습니다. 유성애 중심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성적 끌림이 모두가 당연히 갖고 있는 성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를 ‘비정상’이라 판단합니다. 성기능이나 호르몬에 장애가 있는 건 아닌지, 혹은 과거에 성적인 트라우마를 겪은 건 아닌지 묻습니다. 무성애를 성적 행위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사람들의 합리화 방식으로 여기거나, 혹은 어떤 이유에서든 성적 접촉을 혐오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거나 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요?” 짜장면을 빗대 이런 물음에 대답을 해볼게요. “당신은 평소 짜장면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굳이 나서서 사먹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애인이 당신에게 하루에 한 번씩 짜장면을 먹입니다… (중략) … 그러면 애인이 이해가 안 되다 못해 아예 짜장면에 거부감이 생길 것입니다. 어쩌면 다음부터는 구토감이 올라올 만큼 짜장면이 싫어질지도 모릅니다.”(케이, 에이로그 북 - 오해와 진실, 37~38쪽)

처음에는 그저 무감각했을지라도 원하지 않는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지속되다 보면 아예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욱이 주변 사회가 성적인 접촉을 지극히 당연히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당사자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적으로 트라우마가 있기에 무성애자가 되는 게 아니라 무성애자에게 성적 접촉과 성적 행위를 강요하는 사회가 트라우마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인과관계가 바뀐 것이지요.

원하는 방식대로 정체화할 권리

무성애자들은 사회가 마땅한 규범이라 여기는 가치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기도 억압받기도 합니다. 유성애 중심적 사회는 끊임없이 무성애자에게 성적 끌림을 강요합니다. 소중한 사람이 생겨 연애나 결혼을 하고자 할 때 상대가 유성애자인 경우에는 성적 접촉을 당연한 양 요구해옵니다. 그다지 끌리지 않아서 성적 접촉을 거부하기라도 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결국 성적 접촉을 거부한 무성애자는 마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인 양 비난받고, 상대방은 위로받곤 합니다.

무성애자들은 유성애 중심적 사회에서 다양한 오해와 편견을 겪고 있으며 사회가 설정한 규범적 가치에 의해 억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 끌림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당연한 성질이 아닙니다. 사람은 정말 다양합니다. 저마다 성격이 다 다르듯이, 사람마다 성적 끌림을 느끼는 정도도 서로 다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갑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정체화할 권리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여기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정체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케이 무성애 활동가

※ <어쩌면>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통념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는 꼭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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