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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지나 만난 아이들이 손가락을 펴 보이며 나이 먹은 것을 자랑합니다. “나는 다섯 살이예요” “나는 이제 네 살인데…” 설날도 좋고, 떡국 먹고 나이 먹는 것도 좋기만 한 아이들 덕에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그런데 일곱 살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신입생들이 처음 학교에 모이는 날이라 어린이집에 오지 않았답니다. 섭섭합니다.
내 손에 들려있는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 책을 빼앗아 들은 아이는 어이없게도 네 살이 되었다고 자랑한 민기입니다. 네 살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두 돌이 지난 터라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깁니다.
목판화로 새겨 그린 북쪽 나라 숲의 모습이 펼쳐지고 나는 글을 읽습니다. “북쪽 나라 산 속, 춥고 고요한 겨울 숲입니다. 곰도 다람쥐도 굴속에서 겨울잠을 잡니다.” 배경 설명이 세 장면이나 이어집니다. 집중할 수 있을까 싶어 아이를 쳐다보았지만 열심히 그림을 봅니다.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얼어붙은 얼굴을 내밀고 먼 산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차갑게 빛납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이는 달님을 보고 반가와 하며 손으로 가르칩니다. 드디어 여우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눈 위를 걷는 희미한 발자국 소리…. 여우입니다.
토끼를 쫓아 뛰어 간 숲에서 여우는 또 다른 낯선 숲을 만납니다. 눈에 덮힌 숲은 여우를 몽롱한 환상으로 이끌어 어미 품에서 젖을 먹고 온기를 받으며 자라던 아기 여우였을 때를 추억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우는 새벽과 함께 현실의 숲으로 돌아옵니다. 새벽의 맑고 청명한 기운이 보라 빛으로 표현된 장면에서 여우는 또 다른 여우를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이제 다시 봄이 오면 새끼여우가 태어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민기는 다시 읽어달라더니 아이들과 섞여 노는 내내 커다란 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일년 전 한 돌이 조금 지난 아기였을 때 어린이집에 처음 온 민기가 엄마는 언제 오냐고 묻기만 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아이에게는 어린이집의 환경조차 낯설었고 생존을 위해 사회성을 발휘하며 적응해야 했을 테죠. 이제 잘 자라 낯선 숲 같던 어린이집을 자기 세계로 만들고 친구도 만난 것이 대견합니다.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는 대자연의 품속에 살아가는 생명들의 이야기를 아이들 눈 높이에 맞게 그림책으로 쓰고 그렸습니다. 굵고 힘찬 선을 통해 거칠고 차가우면서 웅장한 홋카이도의 겨울 숲이 살아 있습니다. 대신에 부드럽고 섬세한 선들이 나뭇결 하나 하나, 눈 쌓인 능선 하나 하나를 느끼게 합니다. 맑은 색채는 그림자도 선명한 밤과 새벽 풍경에 빛을 주며 대자연 속에 살아 숨쉬는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아이들은 그 예술성과 문학성에 깊이 반응합니다. 네 살 아이도 아름다운 것, 깊이 있는 표현에 반응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여덟 살이 되어 어린이집을 떠나는 아이들에게도 읽어 주어야지 싶습니다. 작가의 문학과 예술은 학교라는 새로운 숲에 적응하고 새 친구를 만나며 성장할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될 듯 싶습니다. 데지마 게이자부로 글·그림. -보림/8500원.
이성실/자연그림책 작가 6315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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