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교사의 인문사회비타민 /
문화진보의 바른방향 난이도- 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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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인간 생활의 물질적·정신적 진보가 윤리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이므로 윤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문화는 이성의 자연 지배로부터, 그리고 이성의 자기 지배로부터 생성된다. 전자는 물질적 진보를 주고, 후자는 이러한 물질적 토대 위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마음을 규율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윤리적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 그것이 문화 진보의 정당한 방향이다. ―<시민 윤리>(교육인적자원부) 121쪽
대중 문화란 익명의 다수가 손쉽게 접하고 즐기는 문화로서, 대중 매체를 통하여 전파되고 유통되는 문화를 가리킨다.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신문, 잡지, 비디오 등이 대중 문화를 전달하는 주요 매체이다. 이러한 대중 문화는 대중 소비 문화이며, 상업적 목적으로 주로 오락성을 강조하는 낮은 수준의 문화라는 데 많은 문제점이 있다. ―<도덕>(교육인적자원부) 61~62쪽
교과서에서 논제 찾기 삶의 양식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 문화를 단순한 생활 양식으로 이해할 때,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과 다른 생활 양식을 갖고 있다면, 당연히 다른 집단과는 다른 문화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거든. 그것이 바로 ‘문화의 다양성’이야. 사람들은 사는 환경이 다르고, 전해 내려온 지식이 다르고, 인구 등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삶의 양식도 다를 수밖에 없지. 우리는 쌀밥을 먹는데 미국 사람들은 빵을 먹고, 미국 사람들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곤 하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그러지 못하는 등의 차이가 모두 그래서 생겨난 거야. 따라서 문화는, 어떤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해. 한 사회의 문화를 ‘그 사회’의 입장과 ‘그 역사’의 흐름에서 이해하려는 이러한 태도를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라고 하지. 이런 입장에 서면, 어떤 사회에 존재하는 문화는 다른 사회에 비하여 어떤 것이 더 좋고, 더 우수하고, 도덕적인가를 평가할 수 없어. 얼마 전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를 조롱한 덴마크 한 신문 만평 때문에 중동 지역의 덴마크 대사관이 불타고 이슬람권 전체가 벌집 쑤셔 놓은 듯 시끄러운 적이 있었지. 아무리 그것이 만화라는 형식을 빌렸다 해도 무슬림의 종교적 영성과 삶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문화 다양성의 시대에 자신과 다른 가치, 이질적인 종교적 신성성에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을 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마땅해. 이 사건에서 우리는 서양인들의 서구 중심적 가치관과 문화적 편견을 확인할 수 있었어. 하지만 문화의 상대성은 그것이 고유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옹호될 수는 없지. 그것은 때로 엄청난 비합리주의, 폭력, 잔인함의 온상이 될 수 있거든. 끔찍한 예이지만, 고대 멕시코의 아스텍 족은 전쟁에서 잡아 온 포로를 신에게 제물로 바쳤대. 도시 신전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칼로 포로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내어 태양신에 바쳤다는 거야. 해질 무렵이 되어 제사가 끝나면 전사들은 춤을 추면서 그 시체를 먹었대. 16세기에 유럽 인들이 아스텍의 수도에 들어갔을 때 중앙 광장에는, 거기에는 13만여 개의 해골이 쌓여 있었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식인 풍습까지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이처럼 배타적인 야만인들의 미신이나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집단의 맹목적인 충성심 따위를 옳다고 할 수는 없어. 역사를 돌이켜보면 문화적 차이를 내세워, 잔인함과 폭력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한 적이 꽤 있었거든. 멀리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부터 인민사원이니 오대양이니 하는 사교 집단의 집단 자살극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름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들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지. 이런 문제점 때문에 문화 보편주의(cultural universalism)가 세력을 얻게 되었어. 문화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아무래도 야만주의, 비인간주의와 한편인 듯하다는 것이 문화 보편주의자들의 생각이야. 그들의 이러한 생각에는 인간성에 대한 소중한 통찰이 들어 있어. 그것은 인간에게는 차이점도 많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 요소는 아무래도 인간들 간의 공통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문화의 내용을 찾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 그리하여 인간이 공통의 보편 문화를 갖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하지만 역사가 실증해 주듯이, 문화 보편주의가 대안일 수는 없어. 문화 보편주의는 자문화 중심주의와 문화 사대주의로 이어져, 결국 강자의 자기 과시이자 약자의 자기 혐오일 경우가 많았거든. 현실의 역학상 ‘보편’이란 결코 무색 투명한 최적의 보편이 될 수 없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 국가들이 병립하여 경쟁하고 또한 그들 국가 간에는 국제 경쟁력에서의 우열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로 보아, 보편은 항상 누구의 보편이고 보편은 항상 누구의 이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다시 문화 상대주의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야. 문화 상대주의는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를 말하는 것일 뿐, 서로 다른 생활 양식이 충돌을 일으킬 때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 줄 수 있는 규범이 될 수는 없거든. 결국 이 문
제는 가치 판단, 윤리 판단의 문제로 계속 남을 수밖에 없어. 따라서 문제는 문화적 고유함의 편협성과 보편주의적 합리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거야. 우리 시대의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 버린 세계화란 곧 보편주의적 합리성을 조장하는 것인데, 과연 그 속에서 문화적 개성을 어떻게 자리잡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야. 이성과 윤리를 보편의 원리라고 한다면, 문화는 분명 개별성의 원리, 특수의 원리라고 할 수 있거든.
<교과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위 논제와 관련된 기출 문제(2005학년도 한양대 정시 논술 문제)는 인터넷 한겨레(www.hani.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논제 찾기 삶의 양식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 문화를 단순한 생활 양식으로 이해할 때,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과 다른 생활 양식을 갖고 있다면, 당연히 다른 집단과는 다른 문화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거든. 그것이 바로 ‘문화의 다양성’이야. 사람들은 사는 환경이 다르고, 전해 내려온 지식이 다르고, 인구 등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삶의 양식도 다를 수밖에 없지. 우리는 쌀밥을 먹는데 미국 사람들은 빵을 먹고, 미국 사람들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곤 하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그러지 못하는 등의 차이가 모두 그래서 생겨난 거야. 따라서 문화는, 어떤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해. 한 사회의 문화를 ‘그 사회’의 입장과 ‘그 역사’의 흐름에서 이해하려는 이러한 태도를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라고 하지. 이런 입장에 서면, 어떤 사회에 존재하는 문화는 다른 사회에 비하여 어떤 것이 더 좋고, 더 우수하고, 도덕적인가를 평가할 수 없어. 얼마 전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를 조롱한 덴마크 한 신문 만평 때문에 중동 지역의 덴마크 대사관이 불타고 이슬람권 전체가 벌집 쑤셔 놓은 듯 시끄러운 적이 있었지. 아무리 그것이 만화라는 형식을 빌렸다 해도 무슬림의 종교적 영성과 삶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문화 다양성의 시대에 자신과 다른 가치, 이질적인 종교적 신성성에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을 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마땅해. 이 사건에서 우리는 서양인들의 서구 중심적 가치관과 문화적 편견을 확인할 수 있었어. 하지만 문화의 상대성은 그것이 고유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옹호될 수는 없지. 그것은 때로 엄청난 비합리주의, 폭력, 잔인함의 온상이 될 수 있거든. 끔찍한 예이지만, 고대 멕시코의 아스텍 족은 전쟁에서 잡아 온 포로를 신에게 제물로 바쳤대. 도시 신전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칼로 포로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내어 태양신에 바쳤다는 거야. 해질 무렵이 되어 제사가 끝나면 전사들은 춤을 추면서 그 시체를 먹었대. 16세기에 유럽 인들이 아스텍의 수도에 들어갔을 때 중앙 광장에는, 거기에는 13만여 개의 해골이 쌓여 있었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식인 풍습까지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이처럼 배타적인 야만인들의 미신이나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집단의 맹목적인 충성심 따위를 옳다고 할 수는 없어. 역사를 돌이켜보면 문화적 차이를 내세워, 잔인함과 폭력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한 적이 꽤 있었거든. 멀리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부터 인민사원이니 오대양이니 하는 사교 집단의 집단 자살극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름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들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지. 이런 문제점 때문에 문화 보편주의(cultural universalism)가 세력을 얻게 되었어. 문화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아무래도 야만주의, 비인간주의와 한편인 듯하다는 것이 문화 보편주의자들의 생각이야. 그들의 이러한 생각에는 인간성에 대한 소중한 통찰이 들어 있어. 그것은 인간에게는 차이점도 많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 요소는 아무래도 인간들 간의 공통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문화의 내용을 찾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 그리하여 인간이 공통의 보편 문화를 갖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하지만 역사가 실증해 주듯이, 문화 보편주의가 대안일 수는 없어. 문화 보편주의는 자문화 중심주의와 문화 사대주의로 이어져, 결국 강자의 자기 과시이자 약자의 자기 혐오일 경우가 많았거든. 현실의 역학상 ‘보편’이란 결코 무색 투명한 최적의 보편이 될 수 없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 국가들이 병립하여 경쟁하고 또한 그들 국가 간에는 국제 경쟁력에서의 우열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로 보아, 보편은 항상 누구의 보편이고 보편은 항상 누구의 이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다시 문화 상대주의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야. 문화 상대주의는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를 말하는 것일 뿐, 서로 다른 생활 양식이 충돌을 일으킬 때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 줄 수 있는 규범이 될 수는 없거든. 결국 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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