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육체의 배설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 배설구’로서의 화장실의 구실에 대해 고민하려는 이들이라면 인류학적, 인체생리학적, 심리학적 측면에서 화장실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다.
권희정 교사의 삶, 사유, 논술 /
화장실에서 철학하기 / (난이도 = 고등)
“오르게가 내게 말했지/ 지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곳은 언제나 뒷간이었다고/ (중략)/ 겸손의 곳, 그 곳에서라면 자네도 분명히 깨닫게 되리라/ 자신이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일 뿐임을/ 그 곳은 지혜의 곳, 자네는 새로운 쾌락을 위해 불룩한 배를 준비할 수 있으리라/ 육체를 조용히 쉬게 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힘주면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네/ 자네는 바로 뒷간에서 자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리라 - 처먹는 놈이라는 것을!” (<바알>중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무리 재미 있는 수업이라도 이 고통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선생님, 화장실 다녀와도 되요?” 말해볼까 말까, 조마조마 안절부절, 1분이 10년 같고 정신마저 몽롱하다. 식욕이 제 아무리 으뜸 가는 욕구라지만, 배고픔은 참아져도 배변욕은 이길 수 없다. 사색이 다 된 얼굴 앞에서 그 어느 명분이 힘을 쓰랴.
안면도의 한 중학교 미술 시간. 학교에서 가장 관심있는 곳을 그리라는 재미있는 수업이 있었단다. 교실일까, 등나무 벤치일까, 아니면 컴퓨터실, 아니면 도서관? 결과는 뜻밖에도 화장실이다.(<화장실에서 놀자>) 학생들에게 화장실은 가장 좋아하는 곳이자 가장 싫어하는 곳이며, 가장 고쳐졌으면 하는 곳이고 가장 자주 가는 곳이었다. 늘상 잠만 자는 학생들도 이 곳에만 가면 생기를 되찾는다. 바로 매점과 화장실이다. 어디 학생들만이겠는가. 기실 영양분을 흡수하고 찌꺼기를 방출하는 물질대사는 살아있는 생명들의 근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먹고 배설한다. 이 두 가지는 건강의 기본이다. 그러나 먹는 즐거움은 대접받지만 배설 행위는 은밀해진다. 요리책은 많으나 배변에 관한 책은 드물다. 음식은 함께 먹지만 배변은 고독하게 치른다. 온몸으로 나를 만나게 하는 곳, 하지만 화장실은 외롭다. 어찌 보면 화장실은 야누스의 공간이다. 너무나 인간적이면서도 너무나 자연에 가깝다. 야생의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특정한 곳에서만 배설하지 않는다. 원숭이들은 열심히 먹은 것을 참지 않고 배출한다. 원숭이에게는 변비, 비만, 위산 과다, 자가 중독이 없다. 인간만이 자신이 만들어 낸 찌꺼기를 적당한 때에 배설하지 못한다. 문명으로부터 얻은 병은 환경 오염이나 사회 체제 때문만은 아니다. 화장실은 장을 문명화한 상징적 공간이다. 반면 화장실은 인간도 동물임을 알려주는 정직한 공간이다. 왕후장상부터 종교 지도자까지, 배부른 돼지부터 배고픈 소크라테스까지 그 누구라도 배설하지 않고는 몸을 추스릴 수 없다. 배변없이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느 배설물이든 냄새나고 더럽고 파리가 꼬인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의 순환은 더 확실하게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이어준다. 인분을 돼지가 먹고, 그 돼지를 다시 인간이 먹는다. 분뇨는 거름이 되고 그 밭에서 난 식물은 인간의 밥상에 오른다. 몸을 가진 모든 생명들이 배설 행위을 통해 공생관계가 되는 셈이다. 화장실의 역사에도 반전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화장실은 조각상이나 분수대로 치장되어 매우 화려했고 게다가 수세식이었다. 로마인들은 공동 화장실 변기에 빙 둘러 앉아서 신에 대해, 원로원에 대해, 야만인의 침입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서양 중세시대의 건물 안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사람들은 요강에 담은 배설물을 창문에서 거리에 쏟아버렸다. 오물을 피하기 위해 숙녀는 하이힐을 신었고, 신사는 냄새를 가리려고 가발과 향수를 뿌렸다. 야외에 나간 사람들은 적당한 장소에서 배설하기 위해 몸을 가릴 망토를 입었다. 그래서 중세 도시의 지면은 분뇨로 쌓여 갔고, 사람들은 높아진 거리에서 집으로 ‘내려가곤’ 했다.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온 계기는 무엇일까.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에는 시민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국가 권력이 강화되면서 늘어난 부를 기반으로 도로와 하수 시설이 정비되었고, 칙령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경찰관이 생겼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각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가져왔다.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오물의 냄새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근대인들은 도시에서 시골적인 것을 추방했고, 화장실은 문명과 자연의 경계선으로 남게 되었다. 인간의 문명화 노력은 눈물겹다. 나뭇잎에서 출발해 신문지, 화장지, 비데에 이르기까지 뒤씻개의 화려한 변천사를 보라. 하지만 배변행위는 몸을 가진 인간의 숙명이다. 먹은 것을 배출하는 것, 그것은 전 세계가 우리 몸을 통과하는 과정이다. 홀로 있는 그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보낸 배설물을 감상한다. 공공 장소에서는 수치스러워 하지만, ‘나’의 일부였다가 ‘나’ 아닌 것이 된 그것을 마음으로 음미한다. 화장실의 낙서는 두서없는 정신의 배설이며,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자아의 공간이 된다. 잘 살고 싶음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의식인 셈이다. 그래서 화장실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의 해방구이기도 하다. 화장실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도 놓치지 말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주는 정화작용을 ‘카타르시스(설사)’라 불렀으며, 프로이트는 항문에서 인간 무의식의 열쇠를 발견했다. 불교는 그곳을 ‘해우소’로 승격시켰고, 루터도 화장실에 앉아 종교개혁에 대해 번민했다고 한다.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오줌 꿈을 더럽다 무시했던들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학생들은 화장실 가기를 좋아한다.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에 벗어날 핑계도 단연 화장실이 으뜸이다. 화장실에서 학생들은 용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숨어서 담배도 피고, 뒷담화도 하고, 남몰래 멋도 낸다. 물론 때로는 벌청소를 하는 곳이고,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 고3 스트레스를 풀려면 만성변비부터 다스려야 하니,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이왕 간 화장실, 그곳에 들른다면 마음의 기를 모아 철학 냄새도 맡아보자. 정신의 깊은 숙변을 배출할 때 우리 삶도 조금 더 건강해지는 법이니까.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안면도의 한 중학교 미술 시간. 학교에서 가장 관심있는 곳을 그리라는 재미있는 수업이 있었단다. 교실일까, 등나무 벤치일까, 아니면 컴퓨터실, 아니면 도서관? 결과는 뜻밖에도 화장실이다.(<화장실에서 놀자>) 학생들에게 화장실은 가장 좋아하는 곳이자 가장 싫어하는 곳이며, 가장 고쳐졌으면 하는 곳이고 가장 자주 가는 곳이었다. 늘상 잠만 자는 학생들도 이 곳에만 가면 생기를 되찾는다. 바로 매점과 화장실이다. 어디 학생들만이겠는가. 기실 영양분을 흡수하고 찌꺼기를 방출하는 물질대사는 살아있는 생명들의 근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먹고 배설한다. 이 두 가지는 건강의 기본이다. 그러나 먹는 즐거움은 대접받지만 배설 행위는 은밀해진다. 요리책은 많으나 배변에 관한 책은 드물다. 음식은 함께 먹지만 배변은 고독하게 치른다. 온몸으로 나를 만나게 하는 곳, 하지만 화장실은 외롭다. 어찌 보면 화장실은 야누스의 공간이다. 너무나 인간적이면서도 너무나 자연에 가깝다. 야생의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특정한 곳에서만 배설하지 않는다. 원숭이들은 열심히 먹은 것을 참지 않고 배출한다. 원숭이에게는 변비, 비만, 위산 과다, 자가 중독이 없다. 인간만이 자신이 만들어 낸 찌꺼기를 적당한 때에 배설하지 못한다. 문명으로부터 얻은 병은 환경 오염이나 사회 체제 때문만은 아니다. 화장실은 장을 문명화한 상징적 공간이다. 반면 화장실은 인간도 동물임을 알려주는 정직한 공간이다. 왕후장상부터 종교 지도자까지, 배부른 돼지부터 배고픈 소크라테스까지 그 누구라도 배설하지 않고는 몸을 추스릴 수 없다. 배변없이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느 배설물이든 냄새나고 더럽고 파리가 꼬인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의 순환은 더 확실하게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이어준다. 인분을 돼지가 먹고, 그 돼지를 다시 인간이 먹는다. 분뇨는 거름이 되고 그 밭에서 난 식물은 인간의 밥상에 오른다. 몸을 가진 모든 생명들이 배설 행위을 통해 공생관계가 되는 셈이다. 화장실의 역사에도 반전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화장실은 조각상이나 분수대로 치장되어 매우 화려했고 게다가 수세식이었다. 로마인들은 공동 화장실 변기에 빙 둘러 앉아서 신에 대해, 원로원에 대해, 야만인의 침입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서양 중세시대의 건물 안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사람들은 요강에 담은 배설물을 창문에서 거리에 쏟아버렸다. 오물을 피하기 위해 숙녀는 하이힐을 신었고, 신사는 냄새를 가리려고 가발과 향수를 뿌렸다. 야외에 나간 사람들은 적당한 장소에서 배설하기 위해 몸을 가릴 망토를 입었다. 그래서 중세 도시의 지면은 분뇨로 쌓여 갔고, 사람들은 높아진 거리에서 집으로 ‘내려가곤’ 했다.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온 계기는 무엇일까.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에는 시민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국가 권력이 강화되면서 늘어난 부를 기반으로 도로와 하수 시설이 정비되었고, 칙령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경찰관이 생겼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각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가져왔다.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오물의 냄새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근대인들은 도시에서 시골적인 것을 추방했고, 화장실은 문명과 자연의 경계선으로 남게 되었다. 인간의 문명화 노력은 눈물겹다. 나뭇잎에서 출발해 신문지, 화장지, 비데에 이르기까지 뒤씻개의 화려한 변천사를 보라. 하지만 배변행위는 몸을 가진 인간의 숙명이다. 먹은 것을 배출하는 것, 그것은 전 세계가 우리 몸을 통과하는 과정이다. 홀로 있는 그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보낸 배설물을 감상한다. 공공 장소에서는 수치스러워 하지만, ‘나’의 일부였다가 ‘나’ 아닌 것이 된 그것을 마음으로 음미한다. 화장실의 낙서는 두서없는 정신의 배설이며,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자아의 공간이 된다. 잘 살고 싶음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의식인 셈이다. 그래서 화장실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의 해방구이기도 하다. 화장실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도 놓치지 말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주는 정화작용을 ‘카타르시스(설사)’라 불렀으며, 프로이트는 항문에서 인간 무의식의 열쇠를 발견했다. 불교는 그곳을 ‘해우소’로 승격시켰고, 루터도 화장실에 앉아 종교개혁에 대해 번민했다고 한다.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오줌 꿈을 더럽다 무시했던들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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