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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세계화에 땅 뺏기는 농부의 ‘소리 없는 외침’

등록 2007-10-21 15:18수정 2007-10-21 15:34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정지원시인교과서미술기행 / [난이도 = 고등]

이종구의 ‘UR 권씨’와 ‘아버지’(땅)

언제부터 비교우위에 서서 가치판단을 하게 되었을까? 이러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아주 놓쳐버리지는 않을까? 세계화의 화려한 논리는 계산에 능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안한 유혹이고 끝을 알 수 없는 협박이 된다. 80년대 말, 대학을 다니면서 만났던 그림들이 우리 앞에 서서 이 시대가 신봉하는 얄팍한 효율성을 다시 생각해보라 요구하고 있다. 그 가운데 화가 이종구의 그림이 제일 먼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의 그림은 자기의 요구를 정치화하는 데 서툰 사람들을 단단한 연대로 묶어 새로운 시대 가치를 만들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서로에게 가슴 든든한 대지의 뿌리가 되어 굳게 손을 잡는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시대의 아픔을 그린 이종구의 작품  ‘UR 권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시대의 아픔을 그린 이종구의 작품 ‘UR 권씨’
그의 그림은 처음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맨 처음 그의 그림이 캔버스가 아니라 쌀부대나 양곡부대를 선택해 그렸다는 사실에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농촌에서 자란 농부의 아들답게 자신의 그림의 뿌리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리얼리즘으로 농촌의 위기와 농부들의 막막한 절망의 실핏줄들까지 현장감 있게 그려나간다. 척박한 이 땅을 일구며 살아온 부모님들의 시간을 정직한 흙빛 눈으로 그려낸 농민의 화가 이종구. 그는 그림을 통해 우리가 애써 등 돌리고 외면한 현실을 바로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이것이 그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예술로 형상화해내는 발언이자, 가난하고 남루한 버려진 고향을 사랑하는 처절한 사랑법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볼 때마다 숙연해지고 눈물겹다. 그 그림 속에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여전히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물을 대며 그 힘든 노동을 맞바꾼 돈으로 부쳐준 학비가 있다. 밤새 끙끙 앓아도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다시 논으로 가는 일복 하난 타고 난 분들.

조선낫을 들고 목이 쉰 소리로 아버지는 나락이 익어가는 논 앞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 그림이 바로 ‘UR-권씨’이다. 논 한가운데 폭탄처럼 수입 바나나상자가 꽂혀있다. 이 외국산 농산물은 이미 무서운 속도로 논의 일부를 잠식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농부는 추수의 신명나는 기쁨을 잃었다. 털퍼덕 주저앉아 희망은 어디 있냐고 외쳐보지만 아무도 듣는 이가 없다.

이 그림은 1991년에 그려졌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이 그림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들판을 빼앗아 버렸다. 냉혹한 세계화 논리는 모든 가치의 중심을 자본과 이익으로 일반화시킨다. 물론 그 이익이나 자본이 어디에서 창출되고 누구에게 살맛나는 기쁨으로 분배되는지는 무관한 채. 끊임없이 비교 우위론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는 이미 강자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동물적 상황을 신봉하게 한다. 그 안에서 이 그림 속 농부의 안타까운 목소리는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무지몽매한 전근대적 발상으로 치부된 지 오래다. 우르과이라운드가 무엇인지 WTO가 또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들은 아주 절박하게 땅을 움켜쥐어야 우리가 생존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은 굳게 믿고 있다. 이것은 비교 가치가 아니라 절대 가치이고 생명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식 같고 목숨 같은 땅마저 빼앗길 위기에 놓였다. 평생을 씨앗을 심고 가꾸며 살아온 터전을 지키는 것, 이것이 아버지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다.

이종구의 작품  ‘아버지’(땅)
이종구의 작품 ‘아버지’(땅)
‘아버지’(땅). 1997년. 이 경건하고 감동적인 그림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진다. 땅인 아버지. 평생을 흙을 갈아엎고 흙과 함께 살다가 마침내 흙에 뿌리를 내리신 주름투성이 저 얼굴.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좋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온 그에게 웃을 일은 없다. 호탕하게 웃는 법을 잃은 듯 그는 웃는 것이 아니라 얼굴의 근육이 희미하게 움직일 뿐이다. 깊이 팬 논두렁 같은 주름들과 노동에 지친 눈매가 볼수록 쓰라리다.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자식을 기다리듯 쓰러진 나락들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필요하다고 한다. 나도 그 부분은 동의한다. 단지 그 경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하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서 땅을 빼앗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사람들의 살 길을 가로막는 이 상황을 무시한 경쟁력은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거꾸로 말하고 싶다. 아버지의 땅을 되돌려 주는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경쟁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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