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정 교사의 삶, 사유, 논술
권희정 교사의 삶, 사유, 논술 /
[난이도 수준-고2~고3] 방과 후, 학생들의 하교후엔 잔해들이 남는다. 벗어놓은 체육복, 먹다 남은 우유, 뒹구는 교과서들…. 허물 벗은 뱀 껍질처럼 아무도 챙겨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주인의 흔적을 찾아본다. 교과서가 연필자욱에 칭칭 포위되어 있다. 꼭 외우고 말리라는 주문인 듯 교과서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의 대향연이다. 깨알같은 글씨들도 애처롭다. 매일같이 반복했던 ‘암기의 추억’은 학창시절의 괴로움이자 큰 공력이리라. 한 땀 한 땀을 떠올린 자수처럼 그 시절을 채워간다. 이 날들도 언젠가는 나이테의 굵은 선을 넘어서겠지. 지식을 배우고 영혼을 조각해온 나날도 어느덧 종착점을 맞이할 터. 우리는 그 날을 졸업식이라 부르고 인생의 시점을 구분한다. 그 고점을 향하여 묵묵히 버티는 세월, 곧 학창시절이다. 현대는 학력 과잉의 시대다.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 배움을 누리던 때는 관혼상제만이 통과의례였다. 지금은 누구나 학교에 가고, 대학을 넘어 대학원까지 평생교육을 필수처럼 여긴다. 이제는 ‘관학혼상제’여야 하지 않을까. 지식정보화가 강조될수록 배움의 관문은 첩첩산중처럼 우리 삶의 고비를 하나씩 늘려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평균수명이 늘면서 환갑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 가듯, 고등학교 졸업장도 이제는 넘쳐나는 자격증의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공고한 학벌사회에서는 그저 산을 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어느 산을 넘었는지도 중요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학벌 산맥의 베이스캠프, 도달해서 기쁘지만 새로운 이정표를 확인하는 인생의 중간매듭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학력 인플레이션이 빨라져도 역시 졸업은 설레인다. 졸업은 통과해야 할 과업의 완성이자 또 다시 애벌레가 되어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사건이다. 졸업은 나를 참고 나를 이겨온 시간의 층에서 벗어나는 단절의 순간이다. 마치 신화 속 주인공들이 죽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반복하듯 우리도 지금을 벗어나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졸업은 곧 생활의 짧은 죽음이다. 세계의 많은 신화에서의 죽음은 절망과 고통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는 긴 여행 끝에 아버지인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다. 긴 여행은 인생과 영혼의 모험이며 그 세월을 이겨낸 자기 성취의 과정이다. 아버지 살해는 자기를 부정하는 의례이다. 왕이 되어 새로운 나를 이루려면 극복의 순간이 필요하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어떤가. 예수는 죽음으로써 부활할 수 있었다. 본래의 자기인 신성을 회복하는 일은 자신의 현재를 죽임으로써 가능했다. 더 큰 생명은 기꺼이 나를 죽일 때 새롭게 얻을 수 있다. 졸업은 애벌레의 탈피처럼 새로운 삶으로 가는 껍질 벗기와 같다. 우리는 직선처럼 앞으로만 가는 시간 속에 살아간다. 졸업은 인위적 제도이지만, 인생의 순환을 되돌이하는 자연처럼 느껴진다. 초등학교든 고등학교든 반복되는 교육과정은 나선처럼 반복되면서도 상승하는 리듬으로 삶을 구성한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의하면, 전통의 농경 문화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식물의 생명 과정을 매년 죽었다가 부활하는 신으로 인격화했다고 한다. 서아시아의 탐무즈와 아도니스, 로마의 아티스, 이집트의 오시리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화들은 모두 유사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 신들은 매년 자연의 변화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다. 이 신들이 죽음을 맞는 계절이 되면 대지는 황무지가 되고, 신이 재생하는 계절이 오면 다시 세상은 풍요로 변한다. 매년 풍요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여인들은 이 신들을 맞이하는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전통적인 축제와 의례는 새로운 풍요를 맞이하려는 인간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졸업에서도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신성성을 기대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변화가 반복되면서 세계가 성장해간다는 생각은 철학에서도 뿌리가 깊다. 기원전 6세기 에페소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명제로 유명하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세상의 만물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투쟁하면서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같은 강을 두 번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말처럼,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늘 같아 보이면서도 사실은 그만큼 달라진 나의 체험으로 만나게 된다. 우리들의 학창 시절이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밀어올렸다는 사실을 문득 체감하는 실존적 상황이 곧 졸업식이지 않겠는가.
변화의 철학에서는 헤겔을 빼놓을 수가 없다. 헤겔은 모든 것이 대립하는 것과 짝을 이루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정교화한 사람이다. 위는 아래가 있기에 위이고, 아버지는 아들이 있기에 단순히 어른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된다. 한쪽이 있어서 다른 쪽도 그 존재 의미를 가진다. 대립되는 모든 사물들은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면서 발전해간다.
한 톨의 씨앗은 땅 속에 묻혀 썩어야만 발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식물로 거듭나면 더 이상 작고 조그마한 점이 아니다. ‘지양’은 한 단계가 부정되고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식물이 다 자라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시 여러 개의 씨앗이 된다. 다시 또 자신을 지양하여 완성을 이룬 이 때 새로운 씨앗은 예전의 씨앗을 보존하면서도 진화한 씨앗이 된다. 헤겔이 제시한 변증법은 우리의 삶이 늘상 더 나은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졸업도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성장한 나를 확인하는 자기를 위한 축제이다. 졸업은 새로운 씨방을 확인하는 공식 행사인 셈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수능도 끝난 지금, 학생들은 12년의 세월을 지낸 내가 ‘어떤 나’가 되었는지 공인받을 행사를 기다릴 터. 머리를 파마하고 귀고리부터 걸고 싶은 마음이 앞서겠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졸업식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른다. 전통사회에서는 ‘책걸이’를 통해 공부의 성취감을 자축했으나, 이제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해 버렸다. 행사는 우수한 학생들에 대한 표창이 주를 이루고, 가장 자유로울 때 학생들은 사진찍기에 몰두한다.
하지만 내가 넘긴 책장들, 내가 비비댄 책걸상, 나와 함께 숨쉰 선생님과 친구들은 내가 넘은 험난한 산맥의 동반자들이 아닌가. 이타카 섬을 향해 떠났던 오디세우스의 모험처럼, 자신의 여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되돌아볼 시간을 계획해보자. 튼실해진 내 정신의 속살에 대해서도 감격해 주기를! 그리고 부디 혼자서나마 자기를 위한 행사를 빼놓지 마시기를!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난이도 수준-고2~고3] 방과 후, 학생들의 하교후엔 잔해들이 남는다. 벗어놓은 체육복, 먹다 남은 우유, 뒹구는 교과서들…. 허물 벗은 뱀 껍질처럼 아무도 챙겨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주인의 흔적을 찾아본다. 교과서가 연필자욱에 칭칭 포위되어 있다. 꼭 외우고 말리라는 주문인 듯 교과서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의 대향연이다. 깨알같은 글씨들도 애처롭다. 매일같이 반복했던 ‘암기의 추억’은 학창시절의 괴로움이자 큰 공력이리라. 한 땀 한 땀을 떠올린 자수처럼 그 시절을 채워간다. 이 날들도 언젠가는 나이테의 굵은 선을 넘어서겠지. 지식을 배우고 영혼을 조각해온 나날도 어느덧 종착점을 맞이할 터. 우리는 그 날을 졸업식이라 부르고 인생의 시점을 구분한다. 그 고점을 향하여 묵묵히 버티는 세월, 곧 학창시절이다. 현대는 학력 과잉의 시대다.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 배움을 누리던 때는 관혼상제만이 통과의례였다. 지금은 누구나 학교에 가고, 대학을 넘어 대학원까지 평생교육을 필수처럼 여긴다. 이제는 ‘관학혼상제’여야 하지 않을까. 지식정보화가 강조될수록 배움의 관문은 첩첩산중처럼 우리 삶의 고비를 하나씩 늘려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평균수명이 늘면서 환갑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 가듯, 고등학교 졸업장도 이제는 넘쳐나는 자격증의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공고한 학벌사회에서는 그저 산을 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어느 산을 넘었는지도 중요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학벌 산맥의 베이스캠프, 도달해서 기쁘지만 새로운 이정표를 확인하는 인생의 중간매듭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학력 인플레이션이 빨라져도 역시 졸업은 설레인다. 졸업은 통과해야 할 과업의 완성이자 또 다시 애벌레가 되어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사건이다. 졸업은 나를 참고 나를 이겨온 시간의 층에서 벗어나는 단절의 순간이다. 마치 신화 속 주인공들이 죽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반복하듯 우리도 지금을 벗어나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졸업은 곧 생활의 짧은 죽음이다. 세계의 많은 신화에서의 죽음은 절망과 고통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는 긴 여행 끝에 아버지인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다. 긴 여행은 인생과 영혼의 모험이며 그 세월을 이겨낸 자기 성취의 과정이다. 아버지 살해는 자기를 부정하는 의례이다. 왕이 되어 새로운 나를 이루려면 극복의 순간이 필요하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어떤가. 예수는 죽음으로써 부활할 수 있었다. 본래의 자기인 신성을 회복하는 일은 자신의 현재를 죽임으로써 가능했다. 더 큰 생명은 기꺼이 나를 죽일 때 새롭게 얻을 수 있다. 졸업은 애벌레의 탈피처럼 새로운 삶으로 가는 껍질 벗기와 같다. 우리는 직선처럼 앞으로만 가는 시간 속에 살아간다. 졸업은 인위적 제도이지만, 인생의 순환을 되돌이하는 자연처럼 느껴진다. 초등학교든 고등학교든 반복되는 교육과정은 나선처럼 반복되면서도 상승하는 리듬으로 삶을 구성한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의하면, 전통의 농경 문화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식물의 생명 과정을 매년 죽었다가 부활하는 신으로 인격화했다고 한다. 서아시아의 탐무즈와 아도니스, 로마의 아티스, 이집트의 오시리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화들은 모두 유사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 신들은 매년 자연의 변화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다. 이 신들이 죽음을 맞는 계절이 되면 대지는 황무지가 되고, 신이 재생하는 계절이 오면 다시 세상은 풍요로 변한다. 매년 풍요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여인들은 이 신들을 맞이하는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전통적인 축제와 의례는 새로운 풍요를 맞이하려는 인간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졸업에서도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신성성을 기대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양적 변화가 한정량을 넘기면서 질적 비약을 이룩한다는 법칙을 ‘양질전화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졸업은 이 법칙을 적용하기에 딱 알맞은 행사가 아닐까. 질적 비약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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