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된 뒤 군사쿠데타 같은 헌정 중단 사태를 겪은 적은 없다. 그런 일이 닥치면 기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2004년 3월에 본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정도가 ‘정변’급 사건이었다. 훗날 사회부 아르바이트 학생이 회고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텔레비전 앞으로 몰려가 국회 의결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나 혼자 컴퓨터를 마주한 채 ‘운동가’를 부르고 있더라고 했다. 탄핵소추 이후 4월 총선 때까지 쓸 경찰팀의 한 달치 기사 계획을 짜기 시작했던 것인데, 나 자신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몰입했던가 보다.
그런 나도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고 국무회의 자료를 미리 받아봤다는 보도가 나온 뒤로 한동안 일손을 잡지 못했다. 엽기적인 면에서는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이 엘지그룹한테서 1만원짜리 지폐 150억원을 실은 탑차 트럭을 통째로 넘겨받은 ‘차떼기’ 사건 정도가 견줄 만한지 모르겠지만, 크기와 세기 그리고 복잡성에서는 댈 일이 아니다. 성격 자체도 판이하다. 차떼기 사건은 공적 권력(정당)이 민간(기업)의 팔목을 비튼 것이라면, 지금까지 드러난 ‘최순실 게이트’는 일개인이 최고 권력자의 뒷배를 이용해 국가 전체를 공깃돌 삼아 갖고 논 것이다. 공화주의로부터 ‘일탈’했느냐 아니면 공화주의를 ‘전복’했느냐의 차이, 즉 하늘과 땅의 차이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대통령 비서실장의 말은 결과적으로 틀렸지만, 작금의 사태가 그 노회한 정치 관료의 상상 범위마저 훌쩍 넘어선 탓으로 보인다. 내겐 이심전심이다.
그러나 기자의 눈에 비친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두 사건에서 언론의 역할이 어땠는가 하는 것이다. 차떼기 사건은 주로 검찰 수사 결과를 전하는 데 그쳤지만, 이번엔 <한겨레>를 비롯한 일부 언론의 추적 보도로 사태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검찰은 거기 없었다. 독자들은 육하원칙에 따라 정교한 서사로 구성된 기사를 대하기에 취재 과정이 어땠는지 모를 수도 있다. 최순실씨가 출석하는 검찰청사 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는 스펙터클은 꽉 막힌 고속도로를 헤치고 온 차가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정도일 뿐이다. 이번 사건은 내비게이션은커녕 조악한 지도조차 없었다. 저 산 너머 어디에 목적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 하나로 길을 나선 것과 같다. 오라는 데는 없는데 갈 데는 널렸고, 문전박대와 삼고초려, ‘뻗치기’(취재 대상을 한 곳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걸 뜻하는 언론계 은어)는 기본이다. 현장 기자의 일터는 스펙터클하지 않다. 차라리 남루하다.
한겨레가 최순실 게이트 보도의 테이프를 끊고 얼마 안 돼 운 좋게 곁에서 취재를 거들 기회가 있었다. 특별취재팀 기자들은 ‘처절하게’ 현장을 뛰고 있었다. 나보다 몇 해 선배인 팀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취재의 절반은 사금파리를 찾아다니는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사금파리들을 맞추는 것이었다. 퍼즐 맞추기는 그나마 전체 형상의 밑그림이 있지만 사금파리 맞추기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도 처음엔 알 수 없다. 더구나 사금파리가 한 곳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니다. 수없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이쯤 되면 처음 보는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그리는 격이다. 사금파리는 큰 조각도 있고 작은 조각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다. 작은 조각 하나 빠져도 도자기는 온전히 복원되지 않는다. 모양이 뒤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특별취재팀에겐 딱한 얘기지만, 도자기는 아직 절반도 복원되지 않았다. 저들의 손길은 이 나라 모든 힘 있는 곳에 뻗쳐 있었다.
현장 기자의 덕목은 탁월한 정보력과 인적 네트워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끈기와 직관도 함께 요구된다.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라는 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 국민이 허탈감을 넘어 분노로 치닫게 된 데는 앞서 현장을 발로 뛴 기자들의 이 모든 것이 있었다. 나는 워밍업만 하다 만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없지 않다. 매체들 간의 취재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우리 팀 젊은 동료들도 다들 게이트의 현장을 누비는데, 그나마 한발 비켜서 있는 듯하다. 이 연재 첫 회에 너무 엄살을 부린 바람에 캡이 산업재해를 우려하는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명색이 ‘돌아온 현장 기자’로서 숟가락 하나 얹듯이 덕목 하나를 보탤 수 있었으면 한다. “기사의 크기와 가치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최순실 게이트도 사금파리에서 시작됐듯이, 기사가 될 만한 사실의 단서는 일상 속에 무표정하게 시치미 떼고 앉아 있을 때도 있다.
2주 전쯤 수도권 신도시를 휩쓸고 있는 아파트 갭 투자에 대해 기사를 썼다.(
‘갭 투자’ 고양시 휩쓸자, 아파트 1000채 주인이 바뀌었다) 취재를 하게 된 사정은 이렇다. 올해 초 계약 기간 만료가 다가오자 집주인이 연락을 해서 “봄에 집을 내놓을 텐데 그때 가서 새 주인과 계약을 다시 하든 이사를 하든 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봄이 지나고 무더위가 맹위를 떨칠 때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더니 8월 말에야 다시 “집을 내놓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집주인은 집값이 고점을 찍을 때를 가늠하고 있었고, 그 사이 집값이고 전셋값이고 무섭게 뛰어 있었다. 거래를 중개한 부동산 사무소에 찾아가 하소연을 하는데, 중개업자의 말이 귀에 꽂혔다. “선생님이 지금 지옥 한가운데 계시는 겁니다.” 그를 앞세워 새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몇 차례 취재를 했고, 기사 쓰기 직전 저녁 술 약속을 잡아 수첩을 꺼내놓고 마무리 취재를 했다. 기사가 나간 뒤 “나도 그렇게 당했구나” 하는 탄식과 더욱 기기묘묘한 투기 수법에 대한 제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요즘은 몇 달 전 새로 개업한 동네 미용실의 남성 미용사에게도 공을 들이고 있다. 마흔이 넘어 보이는 용모와 빼어난 가위질 솜씨로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는 게 범상치 않아 보였다. 머리를 내맡기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미용업계의 깊숙한 속사정을 알게 됐다. 며칠 전에는 “오늘 일찍 가게 닫고 광화문광장에 나가봐야겠다”며 최순실 게이트와 자영업자의 관계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에 유비쿼터스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현장에 돌아와 보니 젊었을 때보다 상대방의 마음의 빗장을 풀기가 수월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장삼이사의 삶의 서사에 대한 공감 능력은 나아진 듯하다. 현장에는 ‘말씀’이 아니라 ‘목소리’가 있고, 그 목소리에는 삶의 질감에서 오는 살아 있는 메시지가 있다. 언제고 그 미용사가 등장하는 기사를 쓰게 될 것 같다. 그 전에 현장 기자의 1차 본분을 살려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야무진 기사부터 써야겠지만.
안영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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