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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도 박근혜 체제에 책임이 있다

등록 2016-11-11 11:17수정 2016-11-13 10:27

늙은 경찰기자의 일기③: 촛불집회
2011년 희망버스 현장에서 사진 채증을 당해 기소된 동료의 재판에 증인으로 선 적이 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내려준 사다리를 타고 공장 안으로 넘어들어감으로써 ‘공동 주거 침입’의 죄를 저질렀다는 게 기소 취지였다. “나도 함께 넘어갔다”고 하자, 검사는 “기자도 실정법 테두리 안에서 취재해야 하지 않느냐?”고 닦아세웠다. “당신의 사진이 훌륭하지 않다면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가지 않은 것”이라는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의 말을 인용해 반박했지만, 검사는 재반박 대신 무한 동어반복을 택했다. 똑같은 얘기 듣는 게 지겨워질 무렵, 검사가 갑자기 플롯을 전환했다.

“끝으로 묻겠습니다. 증인은 어느 편에 서서 그 글을 썼습니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7월호에 쓴 ‘그 버스의 행선지는 ‘희망’이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본안과 무관한 질문은 답하지 않겠다”고 싸늘하게 말하고 증인석을 내려와 방청석에 앉으려는 순간, 썩 괜찮겠다 싶은 답이 떠올랐다.

‘그렇게 묻는 검사는 어느 편에 서서 묻는 것인가?’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버스는 지나갔다. 내 순발력은 매번 반 박자씩 늦다!

*

지난 5일 서울 도심 집회를 취재하러 갔다. 명동성당에서 출발한 고 백남기 농민 장례 행렬이 종로구청 입구 네거리에서 노제를 지낼 때 그 후미가 종로2가 네거리까지 이어졌다. 네이버 지도로 거리를 재보니 745m였다. 왕복 8차로 가운데 3차로만 채운 것이었지만,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영결식을 취재하러 10분 일찍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세종대왕 동상을 등진 무대 앞에서부터 세종대로 네거리까지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광장 양편 인도와 세종문화회관 계단에도 시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건 반 박자 늦는 순발력의 문제가 아니라, 빤한 것도 내다보지 못하는 예측력의 문제였다. 무대가 빗각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가까스로 몸 하나 세울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영결식이 끝나고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문화제가 시작됐다. 참가자 규모를 가늠해보려고 광장 끝 세종대로 네거리로 나갔다. 시청 방면으로 목측할 수 있는 가장 먼 지점에서부터 인도를 따라 인파가 광장을 향해 굽이쳐오고 있었다. 시민들은 이내 광장 옆 도로마저 덮어버렸다. 점거가 아니라 범람이었다. 어느 편에 서서 보더라도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을 아득히 초과하는 사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참가자가 불어나는 속도도 빨라졌다. 저녁 무렵 양방향 차로를 가득 메운 채 도로 행진이 시작됐다. 선두 깃발이 500m 전방쯤까지 멀어졌을 때 대열 안으로 흘러들어 ‘내재적 취재’를 시작했다. 광장에서 만난 지인들과 함께 걷다가 을지로3가 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중국집에 들렀다. 배고픔보다는 식사를 마치고 나와도 행진이 계속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컸다. 느긋하게 군만두에 짜장면 한 그릇씩을 비우고 나왔다. 대열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나온 방향을 뒤돌아봤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 막혀 광화문광장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광장 끄트머리에서 100m쯤 떨어진 인도 위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쪽 차도와 인도도 빠르게 채워져 갔다. 수많은 집회를 봐왔지만, 참가자 규모 면에서 손에 꼽을 만했다. 이런 기세라면 오는 12일 주말 집회는 기록 경신도 기대해볼 일이다. 물론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으면 나라가 비정상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오는 것을 그 자리의 누구라도 느꼈으면 되는 것이다.

*

집회가 끝나고 일행은 광장의 실핏줄 같은 주변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꼬막 딱지만 한 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 안은 이미 왁자했다. 빈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반가운 얼굴들도 여럿 마주쳤다. 가게 앞에 펼쳐놓은 플라스틱 식탁 하나를 차지해 촘촘히 둘러앉았다. 촛불 시민에서 술꾼으로 변신한 이들은 내 나이로 위아래 열 살 안에 얼추 다 들어와 보였다. 어느 한쪽에서 익숙한 운동가가 흘러나오면 어느덧 골목 전체로 번졌다. “박근혜 정권 퇴진하라!” 누군가 선창하면 모두 따라 외쳤다.

술병 궤짝을 뒤집어 만든 연단 위에 올라서 연설을 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연사들은 제가끔 열변을 토했지만 내용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대통령이 물러나야 할 이유를 찾는 것보다 물러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가 훨씬 힘든 조건 속에서 ‘창조적인’ 연설을 하는 건 승마대회에 혼자 출전해서 2등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의 골목 연설이 이십대 시절 ‘가투’에서 돌아와 늘어놓던 무용담처럼 느껴졌다. 썩 필요치도 않은 이날 집회 규모에 대해 장광설을 펼친 이 글 앞부분처럼.

“우리가 어떻게 고생해서 세운 민주주의인데….” 이야기는 자주 과거를 돌이켰다. “박근혜 끌어내리고 민주주의 회복합시다.” 미래의 과제도 결국은 과거로의 복귀였다. 1970년대에서 90년대 사이에, 그러니까 1987년 6·10항쟁과 그 이후 체제를 대들보처럼 공유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을 이 골목 안의 주류들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전략처럼, 제 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취기와 함께 아련히 소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저들은 그 아름다움을 지금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그 시절로 돌아가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지난 20~40년을 훌륭하게 살아왔을까. (저대로 귀가하면 곧장 술 취한 가부장이 되지 않을까, 월요일 아침이면 가장 먼저 삼성전자 주식 시세를 들여다보지는 않을까….) 아니, 무엇보다 저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아름다움은 이날 광장에 모였던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아름다울까. 그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인 이유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였다. 그럼 저들 가운데 누구는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자칫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대와 세대를 공유하면서도, 나는 저들 편에 온전히 속해 골목의 풍경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거 혹시 지독한 직업병 아닐까.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기형도의 <안개> 중)

박근혜 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체제의 권리와 책임의 지분을 골고루 나눠 갖고 있다. 기성일수록, 기득권에 가까울수록 책임의 지분은 커진다.

*

‘최순실 게이트’는 초현실적으로 낭자하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다. 낭자한 현실이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우리는 갑자기 경악스런 사태로 내몰린 게 아니라 그동안 경악스런 일상을 살 수밖에 없었던 숨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 조의 구호는 이날 광장에 모인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아온 세대, 젠더, 계급, 직능 그리고 국가·자본폭력 피해자들의 용광로로서 더없이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이고, 그래서 순전한 구호인지 모른다. 관건은 그 개별성의 성분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행동이라는 쇳물을 끓여 새로운 미래를 주조하는 것이다.

이날 백남기 농민 영결식이 열리는 동안 10대 청소년들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따로 집회를 열었다. 청량한 목소리와 발랄한 메시지만으로도 이들의 고유함은 광장 구석구석까지 발산됐다. 이날 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정유라씨에게 수억원대 말을 상납하면서도 백혈병 등 각종 산업재해로 숨지거나 병든 노동자들과 유족들을 돈에 눈이 먼 사람들로 치부하는 삼성전자를 규탄했다. 40일 넘게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김영훈 철도노조 위원장은 최순실 게이트가 공공부문 민영화와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들이 충분히 대변되고 옹호되지 않는 나라는 나라인가.

도올 김용옥 선생은 단상에서 “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 우리 민중은 가장 위대한 국민으로 성장하고 있다. 오늘의 집회는 단군 이래 어떤 사태와도 성격이 다르다. 우리는 지금 모든 압제를 끊고 우리의 삶과 의식, 제도까지 혁명할 기회를 맞았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사자후를 토했다. 도올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가리켰으나, 그것을 가능하게 할 우리의 역량에 대해서는 논증하지 않았다. 수많은 집회를 봐온 기자로서 회의가 들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의 말을 수첩에 받아 적은 다음 ‘이 거대한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라고 썼다.

*

고개를 들었다. 집회장 무대를 비추는 대형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수화 방송이 나가고 있었다. 온종일 들여다보고도 그제야 발견한 것이었다. 이날 내가 서야 할 곳에 온전히 서 있지 못했던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지배권력이 이 나라를 제정일치 신권국가로 낙후시키는 동안에도 우리는 초대형 집회에서 수화 방송을 할 만큼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자의 희망이 하나로 모여 그렇게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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