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4일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4강전이 끝난 뒤 남북 단일팀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펼쳐 보이며 사진을 찍고 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2018년 5월4일 일본과의 4강전 당일. 경기장 단일팀 벤치에는 한국 선수 5명과 북한 선수 4명, 총 9명의 자리가 마련됐다. 하지만 국제탁구연맹(ITTF) 경기 규정에 따라 남북 단일팀이 선발한 3명의 선수만 출전할 수 있었다. 이날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남한의 전지희와 양하은, 북한의 김송이 선수였다.
시합 직전, 남북 단일팀 감독 안재형은 선수들을 모았다. “경기 전 단일팀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하나 된 마음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입을 뗀 뒤 그는 힘줘 말했다. “1991년 일본 지바 대회 때도 전력이 약했지만 하나 된 마음으로 중국을 이겼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본과 경기를 해봅시다!”
안 감독은 단일팀이 훈련기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한국과 북한의 단일팀 결성은 2018년 5월3일 오전 10시에 확정됐지만 일본과의 4강전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한국과 북한 단일팀 선수가 함께 훈련할 수 있었던 시간은 단일팀이 확정된 당일 2시간, 일본과 4강전 직전 1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에 안 감독의 역할은 분위기에 휩쓸려 선수들이 동요되거나 경기력이 처지지 않도록 선수들을 독려하는 일이었다. 내심으로는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의 기적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단체전 4강전을 책임져야 하는 한국의 양하은은 묵직한 책임감을 느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것도 부담인데 남북한 단일팀 선수로 뛰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부담감이었습니다.”(양하은) 9명의 선수 중 3명만 뛸 수 있으니 나머지가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그에겐 부담이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지더라도 절대 포기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말아야지.’ 그는 다짐했다.
양하은이 보기에 북한 선수들은 기본기가 탄탄했다. 탁구에선 다리 움직임이 중요한데 북한 선수들은 다리 움직임이 굉장히 좋아 흔들림이 적었다. 양하은은 다리 움직임이 좋지는 않아도 영리하게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편이었다. 상대의 약점을 빠르게 파악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경기를 이끄는 스타일이었다. 경기 전 상대 선수 분석에 시간을 투자했고 실전에선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끌어냈다.
양하은은 적으로 만나야 했던 북한 선수들과 단일팀을 결성했고 자연스레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북한 선수들은 과거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따고, 저희는 동메달을 딴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실력이 있습니다. 당연히 한국과 북한이 함께하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일팀으로 힘이 강해져 다른 나라들이 부담스러워할 것도 같았죠.” 그렇다고 일본팀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한국 여자탁구는 1980~90년대에 비해 실력이 많이 떨어지고 고유한 개성도 흐릿해졌지만 일본 여자탁구는 그 시절부터 꾸준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2018년 5월4일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4강전에서 일본의 이시카와 가스미와 대결을 펼친 남북 단일팀의 김송이 선수.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이 대회 단체전에 출전하는 일본 선수는 이토 미마, 이시카와 가스미, 히라노 미우 세 선수였다. 단일팀 1번 주자는 한국의 전지희, 상대는 이토 미마. 1세트 초반까진 2-2로 맞섰지만 연달아 9점을 내줬고 2세트도 8-11로 역전당했다. 3세트 역시 내주며 세트 스코어 0-3 완패. 일본이 기선을 제압했다.
2단식에 출전한 북한 김송이의 상대는 세계 랭킹 3위 이시카와 가스미였다. 김송이는 잦은 범실로 4-11, 1세트를 내줬지만 2세트에선 11-6으로 가져오며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3세트에선 8-11로 져 벼랑 끝에 몰렸지만 4세트에서 10-6까지 앞섰다. 세트 막판에 연속 4실점 하며 듀스를 허용했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4세트를 14-12로 승리했다. 마지막 5세트에서 김송이와 이시카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또다시 듀스 접전을 펼쳤지만 결과는 14-16 이시카와의 승. 5세트 접전 끝 아쉬운 패배였다.
3단식의 양하은도 히라노 미우와의 대결에서 1·2세트를 내리 내줬다. 쉽지 않은 경기였지만 양하은은 벤치에 앉아 응원하는 선수들에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3세트를 11-9로 잡으며 반격을 시작했지만 4세트(6-11)까지 가져올 순 없었다. 세트 스코어 1-3의 패배. 그리고 일본과의 단체전 전체 스코어 0-3 패배.
“김송이는 가스미와의 경기에서 마지막까지 끌고 가서 졌습니다. 만약 그 경기에서 이겼다면 분위기가 반전돼 이길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죠. 물론 단일팀을 해도 전력상으론 일본에 비해 우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세계 랭킹도요. 그래서 첫번째 경기가 승부의 분수령처럼 중요한데 첫 게임에서도 져버려 무척 아쉬웠습니다.” 안재형 감독은 말했다.
“송이야, 수고했어. 괜찮아.” 벤치에 앉아 응원하던 한국의 유은총은 아쉽게 패배하고 돌아온 김송이를 위로했다. 북한의 단짝 김송이를 열심히 응원했던 유은총은 아쉽게 패배하고 들어온 김송이가 얼마나 속상할지 잘 알기에 마음이 더 아팠다.
탁구, 젊음, 청춘. 이 세가지 공통점만으로도 남북 선수들은 공유할 것이 무궁무진했다. 사는 곳과 체제가 달라도 그들 모두 탁구라는 스포츠에 인생을 걸고 달려왔다. 그것은 현정화가 단일팀 선수로 뛰던 1991년에도 그랬고 27년이 지난 2018년에도 변하지 않고 세대를 아우르는 진리였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고 언제든지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었다. 2018년 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은 이를 가능하게 한 소중한 계기였다.
단일팀의 4강 한·일전이 끝난 뒤 선수들과 감독은 국제탁구연맹이 제공한 대형 한반도기에 각자 이름을 적어넣었다. 한반도기에 사인을 하는 퍼포먼스를 끝낸 뒤에도 선수들은 남북이 함께했던 순간의 감격스러운 열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단일팀이 꾸려지기 전 한국과 북한 선수들의 관계는 다른 외국 관계와 다르지 않았다. 같은 말을 쓴다고는 하나 경기가 겹치지 않으면 딱히 말을 건넬 이유도 없었다. 지금까지 분단국가로 서로 마주해온 ‘적’이란 개념보단 오히려 무관심, 무신경한 관계에 가까웠다. 분단 체제가 70여년 유지되면서 세대가 바뀌었고 젊은이들에게 북한은 ‘가깝지만 먼’ 나라가 아닌 ‘가깝지만 관심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2018년 5월4일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4강전에서 안재형(맨 왼쪽) 남한 감독과 김진명(왼쪽 둘째) 북한 감독 등 남북여자탁구 단일팀 구성원들이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단일팀 이후로 북한 선수들과 인사도 하고 안부도 묻는 사이가 됐지만 그 전엔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웠어요. 저희 윗세대는 얘기도 하고 그랬다지만 저희 세대 때는 거의 말도 안 하고 모른 척하며 지냈죠. 친해질 계기도 없었고요. 다른 나라 선수들과 다 인사하고 지내지는 않거든요. 물론 친분이 있거나 같은 리그에서 뛰었다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요.”(양하은)
단일팀이 성사되고 며칠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남북 선수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다에 수다를 이어갔다. 외국 여행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긴장이 풀리듯 분단된 한반도를 떠나 세계대회에서 만난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한 팀으로 뛴 선수들이 아니었던가.
북한의 김송이는 수줍음이 많고 낯도 많이 가린다는 북한 선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했다. 그는 남한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농담을 하고 장난을 쳤다. 북한의 차효심은 동갑내기인 김송이와 달리 차분하고 침착했다. 김송이는 차효심에게 장난스럽게 타박을 했고 차효심은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을 보며 남한 선수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북한에 대한 관심은 없었어요. 북한 선수는 그저 날카롭고, 어둡고, 앙칼지고, 예민할 것만 같았는데 막상 친해지니 밝고 순수하더라고요. 송이가 장난기가 많았는데 제가 무슨 행동만 하면 ‘나이가 많아서 그렇지 뭐’ 하며 말장난을 많이 한 게 기억이 납니다.” 서효원 선수의 회상이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마지막 날. 북한팀은 한국팀보다 먼저 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한국 선수들과 실무진은 동고동락한 북한팀을 배웅하기 위해 호텔 앞까지 나왔다. 특히나 아쉬움이 컸던 이는 김송이와 단짝처럼 붙어 있었던 유은총이었다. 유은총은 김송이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워 함께 사진을 찍자고 졸라댔고, 김송이는 사진 찍는 것이 귀찮다며 도망가기 바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먹하기만 하던 남·북한 선수들은 단일팀 경험을 통해 끈적끈적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일팀이 성사되기까지 막후에서 노력했던 박창익 대한탁구협회 전무와 주정철 북한탁구협회 서기장의 관계도 훨씬 돈독해져 있었다. “7월 코리아오픈 때 대전에 오십시오. 서기장이 제일 좋아하는 고기 신나게 사줄 테니!” 박 전무는 이어 ‘평양오픈에 초청해달라’고도 했다. 평양오픈(6월)과 코리아오픈(7월)은 그해 연이어 계획돼 있었다.
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단일팀을 성공시킨 자신감이었을까. 박 전무는 지금처럼 남북관계에 정치적 훈풍이 이어진다면 각자 오픈대회에서도 남북 단일팀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7월 코리아오픈에서 남북 단일팀이 성사된다면, 프로 스포츠에 밀려 비인기 종목이 된 탁구도 다시 한번 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늘 그러했듯 남북 단일팀은 스포츠인들의 노력만으론 성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일팀에 훈풍이 불다가도 어느 날 한순간 뒤틀린 남북관계에 모래성처럼 어그러질 수 있었다. 그것이 스포츠 남북 단일팀이 갖는 한계이기도 했다.
“난 서기장이 남한 오면 고기를 사줄 텐데 내가 평양 가면 뭘 사줄 거요?” 박 전무가 농담을 건넸다. “평양 오면 내 맛있는 평양랭면을 사주갔소.” 주 서기장이 답했다. 스웨덴에서 여자 탁구 단일팀만 결성돼 내심 실망했던 남자 대표팀 김택수 감독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번 스웨덴 경기에선 스포트라이트가 여자 단일팀에만 쏠렸습니다. 다음엔 남자도 단일팀을 만듭시다!”
그의 말에 한국과 북한 탁구인들이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김 감독이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는 실제로 남자 단일팀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리고 그의 말은 새로운 단일팀의 씨앗이 됐다.
2018년 5월4일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4강전이 끝난 뒤 한국 대표팀 안재형 감독이 한반도기에 사인을 하고 있다. 할름스타드/EPA 연합뉴스
김지나 작가·<뉴스핌> 기자, 공동기획 팩트스토리
▶ 스포츠는 정치와 국경을 넘을 수 있는가. 30년 전인 1991년에 이어 2018년 또다시 남북 탁구 단일팀이 꾸려졌다. 그해 봄,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직후였다. 30년 전 단일팀 선수들은 감독과 스승이 되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남북관계가 안개에 싸인 지금, 새 시대를 열었던 단일팀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본다. 이 기획은 영화사 명필름과 팩트스토리가 함께 했고, 명필름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