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19일 코리아오픈 탁구대회 남북단일팀 혼합복식에서 단일팀 최일(왼쪽에서 둘째)-유은총 조가 16강 경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코리아오픈 국제탁구대회 둘째 날. 남쪽의 서효원 선수와 북쪽의 김송이 선수가 전날 승리를 거둔 유은총·최일 혼합복식조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서효원과 김송이는 두달 전 스웨덴오픈에서 이미 손발을 맞췄던 짝이었다. 둘은 찰떡궁합이었다. 2013년 27살 늦은 나이에 태극마크를 단 서효원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꾸준히 정진하는 대기만성형 노력파 선수였다. 2016년 리우올림픽 단식 동메달리스트인 김송이는 북한 여자 탁구의 수비형 에이스였다.
“코리아오픈에서 복식 파트너가 없어 복식에 뛸 수 없었는데, 김송이 선수와 파트너로 뛸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김송이는 저보다 뛰어난 선수이기 때문에 김송이에게 배우고,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죠.” 서효원은 7살이나 어린 김송이에게 ‘한 수 배우겠다’며 자신을 낮췄다. 북한 여자 대표팀 김진명 감독의 가르침 역시 서효원에겐 값진 경험이었다. “김진명 선생님은 말씀을 조근조근 하시는데, 훈련할 때 공을 묵묵히 쳐주면서 자세를 잡아주셨습니다. 무언 속에서 선생님이 뭘 알려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죠. ‘김송이는 이렇게 연습을 하는구나, 아, 이런 훈련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 왔죠.”
2000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응원 열기가 달아오르며 경기장 분위기는 점점 고조됐다. 생각지 못한 뜨거운 열기에 서효원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참 많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쉽게 상대할 수 있는 팀이었고 카메라만 없으면 긴장 없이 그냥 할 수 있는 경기죠. 그런데 기대 이상의 관심을 받으니 생각보다 더 긴장이 됐습니다.”
“야, 나 너무 긴장돼!”(서효원) “저도 너무 긴장됩니다.”(김송이) 평소 웃음기 많던 김송이도 경직된 표정으로 답했다. 스포트라이트의 무게, 그것은 오롯이 경기를 뛰는 선수가 혼자 짊어지고 극복해야 할 짐이었다.
오전 10시15분. 상대팀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3세 올가 김과 레지나 김이었다. 두 사람의 할아버지는 모두 연해주로 이주했던 고려인이었다. 이들 입장에서도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남북단일팀과 경기를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경험일 터였다. 같은 피가 흐르는 4명의 선수가 3개의 국적으로 녹색테이블에서 만난 셈이기도 했다. 그리고 승부에 돌입했다. 서효원은 현정화 감독의 조언대로 김송이와 합을 맞추며 경기를 주도했다. 복식 경험이 많은 김송이가 서효원의 공격을 뒷받침했고 서효원은 공격적인 드라이브와 스매시를 구사했다. 두 사람은 우즈베키스탄 조를 3-0으로 완파하고 본선에 진출했다.
2018년 7월19일 코리아오픈 셋째 날은 4개조(이상수-박신혁, 장우진-차효심, 유은총-최일, 서효원-김송이)의 경기가 펼쳐지는 ‘단일팀 데이’였다. 단일팀의 또 다른 혼합복식 조합인 장우진(남)-차효심(북) 조의 상대는 홍콩의 웡춘팅-두호이켐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그러했듯 장우진 선수 역시 뜨거운 관심과 취재 열기에 경기 전 긴장감이 목을 조여왔다. 단일팀이 남북 평화를 전면에 내걸고 결성됐다고는 하나 본질은 스포츠 경기였고 선수에게 경기는 이겨야 하는 싸움이었다. 다행인 것은 관심이 집중되는 ‘큰 대회’에 장우진이 강하다는 점이었다. 승부욕과 근성도 두둑했다. 장우진은 한 살 많은 차효심에게 “누나, 그냥 편하게 얘기하세요”라며 다가갔지만 차효심은 “아닙니다”라며 어색해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탁구 스타일이 잘 맞았다. 차효심은 기본기가 튼튼해 안정적으로 플레이를 했고 장우진은 공격적이었다. 차효심은 남자 선수의 공격도 무서워하지 않고 받아쳐내는 배포도 있어 장우진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줬다.
그러나 처음 호흡을 맞춘 터라 홍콩과 한 예선전에서 2세트 중반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장우진이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초반부터 플레이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1세트를 패한 뒤 2세트에서도 2-7로 몰렸다. 경직된 장우진에게 차효심이 무심하게 한마디 툭 건넸다. “지더라도 편하게 합시다!” 그 순간 장우진은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편해졌다. 그제야 한 팀같이 느껴졌다.
“경기장에 그렇게 사람이 많이 왔던 투어대회는 처음이었습니다. 응원도 엄청 하니 막상 긴장이 많이 됐죠. 취재진도 너무 많았거든요. 세계경기에서도 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 익숙지 않고 부담도 커서 2세트까지 실수를 많이 했는데 효심이 누나가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장우진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자신감을 되찾은 장우진은 공격적인 플레이로 2세트 역전에 성공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3·4세트도 단일팀의 승리였다.
2018년 7월19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코리아오픈 탁구대회 혼합복식 16강전을 마친 남한팀 전지희(맨 왼쪽), 이상수(왼쪽에서 셋째)가 단일팀 최일(왼쪽에서 둘째), 유은총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리아오픈에서 단일팀에 첫 승리를 안겼던 유은총-최일 조가 16강에서 맞붙을 상대는 얄궂게도 남한 선수로 이뤄진 이상수-전지희 조였다. 이상수-전지희는 한달 뒤 열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을 앞두고 있어 코리아오픈에서 따로 남한팀으로 출전했다. 이들은 혼합복식의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관중들은 대체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할까? 고민할 것 없이 양쪽 다 응원하면 됐다. 대전 시민들로 구성된 공동응원단은 단일팀과 남한팀을 함께 응원했다. “힘내라! 힘내라! 코리아 힘내라!” 응원단의 함성이 경기장을 울렸다.
유은총과 최일이 예선전 승리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이상수-전지희는 막강한 상대였다. 화끈한 공격형인 이상수의 백드라이브는 강력했다. 다소 기복이 있긴 했지만 한번 공격이 들어맞은 날이면 이상수를 대적할 만한 적수는 없었다. 전지희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귀화한 전지희는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 여자 탁구의 에이스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노리고 있는 이상수-전지희 조는 승부에서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북한의 박신혁 선수와 단일팀으로 뛰었을 땐 승패와 관계없이 즐긴다는 생각으로 부담이 덜 됐습니다. 하지만 전지희 선수와 남한팀으로 뛰었을 땐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죠. 전지희 선수와 뛰게 될 아시안게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요. 경기력을 올리기 위해선 실전게임에서 서로 맞춰나가야 하는데 단일팀 경기에서 지게 되면 기회가 없어지니 저희로선 긴장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상수)
경기가 시작됐다. 남한팀이 단일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시소게임이 이어졌다. 1세트를 남한팀, 2세트를 단일팀이 가져갔다. 3세트를 남한팀이 이겨 세트 스코어는 2-1. 4세트에선 숨 막히는 접전이 펼쳐졌다. 10-10 듀스를 이뤘고 단일팀이 1점을 보태 11-10을 만들었다. 단일팀이 1점만 더 내면 되는 세트포인트였다.
‘이대로만 하면,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어!’ 유은총은 생각했다. 그 순간 기회가 왔다. 이상수의 수비 실패로 공이 뜬 채로 네트를 넘어왔다. 최일이 침착하게 쳐넣으면 4세트를 가져올 수 있었다. 최일이 라켓을 휘둘렀다. 그러나 라켓에 공이 비껴 맞았고 공은 탁구대와 멀어졌다. 유은총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온 최일의 범실에 주저앉아 크게 웃고 말았다. 최일도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에 “아이고!” 하며 머리를 잡고 자책했다. 11-11로 따라잡힌 4세트는 결국 11-13으로 역전당해 단일팀의 패배로 끝이 났다.
2018년 7월19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코리아오픈 탁구대회 여자복식 16강전에 출전한 단일팀 서효원(왼쪽), 김송이가 중국을 상대로 경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예선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꺾고 올라온 서효원-김송이 조는 중국의 여자단식 세계 랭킹 1·2위인 주위링-왕만위 조와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세계 랭킹으로 따지면 중국 선수에 비해 서효원과 김송이 선수는 한참 밀려 있었다. 북한 선수들이 세계대회 출전 경험이 없어 실력에 비해 순위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쉽지 않은 경기가 예상되는 대진표였다. 그러나 서효원-김송이가 스웨덴 대회 때부터 손발을 맞췄고, 열정적인 응원이 뒷받침하는 홈경기의 이점에서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승부였다.
서효원-김송이는 듀스 접전 끝에 첫 세트를 12-10으로 따내며 승기를 잡았다. 김송이의 낮고 깊숙한 커트와 서효원의 날 선 드라이브가 엄청난 시너지를 냈다. 2세트를 내줬지만 3세트를 다시 가져왔다. 한 세트만 따내면 코리아 단일팀이 세계 최강 중국 복식팀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힘내라! 코리아!” “우리 선수, 잘한다!” 단일팀을 응원하는 압도적인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두 팀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접전을 이어갔다. 8-8 동점에서 중국팀이 작전시간을 부른 뒤 단일팀은 연속 2득점 하며 10-8로 앞섰다. 한 점만 더 얻으면 경기를 끝낼 수 있는 매치포인트였다. 이번에는 단일팀이 작전시간을 요청하며 끝내기 1점을 노렸지만 도리어 2실점 하고 말았다. 10-10 듀스. 단일팀은 다시 2실점 하며 4세트를 뺏겼다. 뼈아픈 결과였다.
그리고 운명의 5세트. 5-9로 리드를 내준 단일팀은 패색이 짙었지만 4점을 내리 얻으며 9-9 동점을 이뤘다. 무서운 상승세로 승리의 기운이 잠깐 돌았지만 중국팀은 강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중국은 연거푸 2점을 따내 5세트를 끝냈다. 중국팀의 승리였다.
생각보다 선전한 시합이었던 만큼 아쉬움도 큰 경기였다. 특히 서효원은 4세트를 잃은 아쉬움이 컸다. 자신의 범실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송이야, 미안해.” 하지만 김송이는 “괜찮다”며 언니인 서효원을 다독였다. 그렇게 이번 코리아오픈에서 단일팀의 기대주였던 서효원-김송이 조의 경기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단일팀의 도전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김지나 작가·<뉴스핌> 기자, 공동기획 팩트스토리
▶ 스포츠는 정치와 국경을 넘을 수 있는가. 1991년에 이어 2018년 또다시 남북탁구단일팀이 꾸려졌다. 그해 봄,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직후였다. 30년 전 단일팀 선수들은 감독과 스승이 되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남북관계가 안개에 싸인 지금, 새 시대를 열었던 단일팀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본다. 이 기획은 영화사 명필름과 실화 전문기획사 팩트스토리가 함께 했고, 명필름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