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상임대표. 사진 여성환경연대
1만개.
여성이 평생 사용하는 일회용 생리대 개수다. 대부분의 여성은 일생에 거쳐 2천일가량 생식기와 피부에 닿는 일회용 생리대를 쓴다. 생리대를 쓰는 많은 여성이 어떤 ‘증상’을 겪는다. 여성의 고통스러운 증상을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라며 이 사회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삭제된 여성의 고통에 ‘생리대 유해물질 검출’‘생리대 안전성 문제’ 등의 이름을 붙이자 그제야 사회는 관심을 갖는 듯했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사에서 멀어지자 생리대 사용 뒤 이상 증상을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는, 이 사회의 관습은 다시 가동했다.
정부는 4년간 진행한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결과를 반년 넘게 공개하지 않았다. 생리대 안전성 문제를 공론화해 온 여성환경연대의 이안소영 상임대표는 14일 <한겨레>와의 서면인터뷰에서 “안전한 생리대는 여성 인권과 건강의 기초이다. 정부와 기업은 ‘개인적 특성 탓’ ‘과학적 증거 부족’이란 변명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생리대’ 문제는 여성의 사적인 문제에서 ‘공적인 의제’가 됐다. 이런 변화는 생리대와 관련된 여성의 경험과 증언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시작은 ‘면 생리대 사용 경험’이었다.
여성환경연대가 생리대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건 2000년대 중반 면 생리대 워크숍을 열면서다. 수많은 여성이 “일회용 생리대를 쓰다가 면 생리대를 쓰니 생리통, 생리불순 등의 문제가 줄어들었다”고 증언했다. “일회용 생리대에 함유된 유해물질 조사를 정부에 요구했지만 ‘개인적인 특성’ 탓이라거나 ‘증거가 없다’는 반응만 돌아왔어요. 당시에는 관련 연구결과도 드물었기 때문에 반박도 어려웠죠.”
‘증거가 없다’는 변명을 댈 수 없게 여성환경연대는 증거를 직접 찾기로 했다. 직접 일회용 생리대의 유해물질 방출시험을 진행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2014년 미국 비영리단체 ‘지구를 위한 여성의 목소리(WVE)’의 일회용 생리대 검출시험 자료를 보게 되면서다. 2017년 3월 여성환경연대는 강원대 환경융합학부 생활환경연구실에 ‘생리대 10종의 유해물질 방출시험’을 의뢰해 그 결과를 받아들었다. 전 제품에서 유해물질 22종이 검출됐다는 결과였다.
여성환경연대가 2017년 8월24일 기자회견을 열어 ‘일회용 생리대 부작용 규명과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순식간에 모인 수천명의 목소리는 ‘생리대 관련 증상=개인적 특성’이라는 주장 역시 변명에 불과한 점을 드러냈다. 이안 대표는 “2017년 일회용 생리대와 관련한 피해 의심 사례 제보를 받는다고 알리자마자 48시간 만에 3009명이 제보를 해왔다. 정부와 기업이 여성환경연대 등의 문제 제기에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자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라면서 “이 과정을 통해 예전에는 개인적 문제로 폄하되던 생리의 문제가 공적 의제로 떠올랐다”고 짚었다.
결국 정부는 ‘생리대 건강영향조사’를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안 대표는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민관협의회 민간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민관협의회는 지난 2017년 12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일회용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추진을 위해 구성됐다. 이 협의회는 정부 소속 위원 4인, 민간위원 17인(역학조사·노출 및 위해성·여성질환 평가·국민소통 등 각 분야 전문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소통 분야 민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안 대표는 정부의 협의회 운영과 관련해 “투명성과 민주적인 운영, 연구의 독립성 보장 등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8년 예비조사부터 1·2차 본조사에 이르기까지 정부 측 위원과 민간위원이 협의와 합의의 과정을 거쳐 진행한 연구결과가 나왔다면, 그 결과를 협의회에 보고하고 연구 함의와 개선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게 합당한 절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협의회 회의는 1년 가까이 열리지 않고 있고, 특정 부처의 의지에 따라 연구 발표도 미뤄지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했다.
이안 대표는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결과가 하루빨리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는 지난 11일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결론이 지난 4월 도출됐으나, 관계부처의 반대로 반년간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관계부처인 식약처와 질병청이 일회용 생리대 사용이 외음부의 가려움증·통증 등 생리 관련 증상 발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게 요지다. 그는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결과를 토대로 필요한 제도 개선과 관리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며 “정부와 기업은 (생리대 부작용이) 개인적 특성 탓이라는 변명을 되풀이하는 대신 생리대의 부작용 경험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생리대 안전과 여성건강을 위한 행동네트워크가 2018년 6월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생리대 제조사 깨끗한나라의 여성환경연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여성환경연대
여성환경연대는 1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생리대 릴리안의 제조사 깨끗한나라가 “여성환경연대의 행위로 매출이 급감하는 등 재산적·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2017년 여성환경연대의 생리대 10종 유해물질 방출 실험 결과 공개 뒤 일부 언론을 통해 깨끗한나라의 생리대 ‘릴리안’이 조사대상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릴리안을 썼던 여성의 부작용 경험 제보가 이어졌고, 여성환경연대는 이 제보를 바탕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깨끗한나라는 제품을 환불해주고, 생산·판매를 중단했다. 이안 대표는 “만약 패소하게 되면 단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환경보건운동과 시민사회에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될까 봐 두려움도 컸다”고 했다. 정부나 기업에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가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패소하는 결말을 맞으면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사회의 활동도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다행히도 1심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전체 기각했다.
1심 재판부는 “여성환경연대의 문제제기는 여성 건강을 위한 공익적 활동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렇듯 이 사회는 ‘생리의 문제’를 공적 의제로 바라보게 됐다. 이제 ‘생리대 조사’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이안 대표는 “생리대 건강영향조사가 끝이 되어선 안 된다. 일회용 생리대에 대한 통합 위해성 평가(생리대 함유 유해물질에 동시에 노출될 가능성을 고려한 위해성 평가) 방법 개발과 관리 기준을 마련하는 등 후속 절차가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여성 건강을 통합적으로 다룰 국가 차원의 여성환경건강센터를 수립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