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장고가 없었다면… 사진 이정우 기자
[매거진 Esc] 요리의 친구들
얼음도 살인무기가 될 수 있다. 1992년에 개봉한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캐서린 트러멜(샤론 스톤)은 남자를 유혹한 뒤 침대에서 흉기로 살해한다. 그러나 형사 닉(마이클 더글러스)은 도무지 범죄에 사용된 송곳을 찾지 못한다. 얼음송곳이 녹아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속 등장인물들은 얼음송곳에 찔려 쓰러졌고, 관객들은 캐서린이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다리를 바꿔꼬는 장면에서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군대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98년 겨울 훈련단을 마치고 처음 배치된 소대에서 주계병(취사병)의 손발 노릇을 했다. 주계병은 수십명분의 음식을 준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소대의 막내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킬 권한을 갖고 있었다. 주계병은 전형적인 경상도 출신 호인이었지만 가끔 ‘꼭지가 돌았다.’ 늦은 밤 순검(점호)이 끝나고 모두 잠든 사이, 주계병은 나를 포함한 막내 몇 명을 “감자 껍질 깎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소대 뒤편 참호로 집합시켰다. 그때 막내들의 목덜미를 내리친 것은 냉동된 꽁치였다. 아마 냉동된 지 6개월은 더 됐을 ‘보급꽁치’는 뼛속까지 얼어있었다. 맞을 때마다 둔탁한 느낌과 함께 꽁치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퍼졌다. 그때 나는 ‘아프다’는 느낌보다 바다가 보이는 고향 생각을 더 했던 것 같다. ‘꽁치로 맞는다’는 약간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때문에 키득거렸다가 몇 대 더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냉장고를 볼 때마다 ‘1998년 겨울’이라든지 ‘냉동꽁치’를 떠올리게 된다. 개인적인 악연과 달리, 냉장고 없는 일상은 떠올리기 어렵다. 냉장고가 없었다면 냉동 꽁치에 맞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보다 맛있는 꽁치를 못 먹는 괴로움이 더 컸을 것 같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보면,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사가 상업화한 초창기 냉장고의 1922년 모델은 714달러로, 같은해 판매된 포드사의 보급형 티(T)형 승용차 가격 450달러보다 훨씬 비쌌다. 미국에서는 이미 30년대에 60%의 가구에서 냉장고를 두고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70년대에 가서야 비슷한 보급률에 다다랐다. 우리나라에서는 65년 엘지전자(당시 금성사)가 처음으로 국산 가정용 냉장고를 생산했다. 한국군에는 80년대 후반부터 냉장고가 보급돼 장병들이 꽁치를 포함한 신선한 생선과 야채 등을 먹기 시작했다고 국방부는 밝혔다.
혼자 사는 미혼 남자에게 냉장고는 ‘우렁각시’같은 존재다. 바로 먹을 수 있는 냉동음식과 정크푸드를 저장할 수 있는 소중한 곳간이다. 또 한 철이 왔다. 옷가지만 정리하지 말고 오랜만에 냉장고 문을 열고 청소하자.
고나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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